안녕, 우울증 - 남성한의사, 여성우울증의 중심을 쏘다
강용원 지음 / 미래를소유한사람들(MSD미디어) / 201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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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우울증, 사치스런 병이 아닙니다

  십 년 이상 우울증, 때로는 조울증(양극성장애) 때문에 고생하고 있는 여성 한 분이 이런 말을 하면서 서럽게 울던 모습이 아직도 눈에 밟힙니다.

  “시어머니도 저처럼 우울증을 겪으셨습니다. 그래서 이해를 해주시는 편이라 한결 나았죠. 그런데 어느 날 시어머님이 오셔서 우울증은 부자(호강)병이라고 하시는 거예요. 얼마나 아픈지 아시는 분의 입에서 그런 말이….”

  보통 그럽니다. 네가 뭐 모자란 게 있다고 우울증이냐, 호강에 겨워 요강에 똥 싸고 자빠졌다고. 사는 데 정신없어 봐라, 우울증이 비집고 들어올 틈이 있겠느냐고. 요컨대 한가해서 생긴 병이라는 말입니다.·······링컨이 그렇게 한가한 인생을 살아서 우울증에 걸렸던가요, 물감 살 돈이 없어서 노란색 그림만 그릴 수밖에 없었던 반 고호가 얼마나 호강에 겨웠으면 양극성장애에 시달린 것일까요.·······우울증은 결코 사치스런 병이 아닙니다.(91쪽)


우울증을 사치스런 부자(호강)병이라고 매도하는 것은 정신력 타령하는 것과 똑같이 모순을 안고 있습니다. 먹고 사는 데 정신없으면 우울증에 걸리지 않으며 먹고 살만하니까 호강에 겨워 그따위 사치스런 병에 걸리는 것이라는 말과 뭐가 모자라서 우울증이냐고 질타하는 말은 앞뒤가 맞지 않습니다. 앞말은 가난해서 열심히 살면 우울증에 걸리지 않는다는 것이고 뒷말은 가난하지 않은데 왜 우울증에 걸렸느냐는 것이니까 말입니다. 결국 이는 논리의 붕괴를 아랑곳하지 않고 인간이기 때문에 걸리는 마음병을 원류猿類의 먹고 사는 수준에서 공격하는 행태입니다. 먹고 사는 데 죽어라 매달리고, 먹고 살만하면 딴소리 말아라, 이런 훈계입니다. 그야말로 ‘먹고사니즘’교의 말갛고 매끈한 설법입니다.


자본주의는 진화한 인간의 모든 역량을 돈에 결집시키고 돈은 인간을 원류로 퇴화시킵니다. 돈을 쥐려고 인간은 영혼을 기아飢餓에 말립니다. 영혼을 말린 원류 99%는 끝내 우울조차 감지하지 못한 채 빈손으로 죽어갑니다. 돈을 쥐면 인간은 영혼을 향락에 절입니다. 영혼을 절인 원류 1%는 자신이 ‘물건’인 줄 알지 못한 채 남을 ‘물건’이라 부르다 죽어갑니다.


저 99% 가운데 기아에 덜 말려진 영혼으로 말미암아 아픈 상태를 일러 우울증이라 합니다. 우울증을 겪는 자들 가운데 인간을 회복하려고 혼신의 힘으로 저항하는 자들의 숭고함에 힘입어 원류는 급격한 멸절 상태를 면하고 있습니다. 이들이 몇 %까지 되는가, 얼마나 강하게 저항하는가에 따라 역사가 달라질 것입니다.


아프지 않고 저항도 않고 지금 이대로 행복하십니까? 그 행복이 가짜라는 진실에 눈뜨십시오. 끝내 원류로 살다 죽을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아프십니까? 아프다는 사실을 있는 그대로 느끼고 알아차리고 받아들이십시오. 저항을 시작할 수 있습니다. 이미 저항하고 있습니까? 부디 지치지 마십시오. 저항이 번져가는 길목에 함께 서겠습니다.


기조우울증의 체취를 여전히 풍기는 제게 딸아이가 '음식 만들기'를 권했습니다. 딸아이는 제 미감의 중용을 근거로 들었습니다. 우리사회를 홀리고 있는 먹방, 그러니까 food porn은 우리의 미감을 향락으로 타락시키고 있습니다. 향락은 놀이의 극단입니다. 본디 먹는 것은 즐거운 놀이와 거룩한 제의가 역설적 일치를 이루는 중용의 시공입니다. ‘먹고사니즘’교는 먹방을 교사해 제의를 추방했습니다. 이 진실에 대한 이해와 미감이 긴밀하게 이어져 있으되 놀이에 서투른 아비의 상태를 딸아이가 꿰뚫어보았습니다. 중용 미감을 빚는 음식 만들기가 제게는 놀이를 되찾는 치유이고 사회에는 제의를 되찾는 저항일 것입니다. 언젠가 제가 만든 음식 놓고 그대를 초대할 수 있도록 한 판 놀아봐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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