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 우울증 - 남성한의사, 여성우울증의 중심을 쏘다
강용원 지음 / 미래를소유한사람들(MSD미디어) / 2011년 1월
평점 :
절판



 ☸ 너무 진지한 삶의 자세에서 나온 병·······

  돌아보면 저는 또래들이 어울려서 하는 놀이에 그리 적극적이지 않았습니다. 가령 구슬치기, 딱지치기, 술래잡기, 다방구, 비석치기는 대개 구경하는 편이었지요. 그래서 어린 시절을 거치는 내내 뭐 하나 잘하는 놀이가 없었습니다. 중고등학교를 지나는 동안에도 각종 구기운동을 포함해 놀이를 하는 데는 거의 백치에 가까웠습니다.

  아마도 이런 성향은 놀이가 가지고 있는 순수한 즐거움을 무의미하거나 무가치하다고 판단하는 인지 도식 탓인 듯합니다. 그렇다고 남들이 노는 시간에 죽어라고 공부를 한 것도 아닙니다. 아마도 겉으로 보기에 공부 행위에 근접하는 ‘책상놀음’이 아니었을까 생각합니다.

  어머니와 화목한 가정에 대한 그리움, 억압과 가난에서 벗어나고 싶은 소망, 누군가를 정당하면서도 자애롭게 보살피고 싶은 욕망, 계속해서 파괴되는 무질서한 가정생활에 대한 반감들이 담긴 생각을 끊임없이 반복하고 글로 쓰거나 그림으로 그리는 행동이 제 주된 ‘유사 놀이’였습니다.

  결국 놀이를 통해 확보했어야 할 삶에 대한 유희적 감수성은 둔해지고 진지함에 압도되는 엄숙주의로 나아갈 수밖에 없었지요.·······놀이를 낯설어하는 과잉된 진지함, 이 엄숙주의는 우울증이 삶의 기조로 자리 잡는데 인과관계를 주고받으며 짝패가 된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제가 저의 우울증을 스스로 치유하며 잡은 큰 화두가 바로 ‘어찌하면 삶을 놀이로서 살 수 있을까?’하는 것이었습니다. 삶을 즐거움과 쾌감으로 체득하지 못하고 버거운 과제로 떠맡은 어린 날들의 그늘에서 벗어나 원 없이 깔깔거리고 손뼉 치며 살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노니는 삶에 어찌 우울증이 깃들겠습니까. 설혹 우울함이 온다 해도 가치로 뿌리내릴 테지요. 관계의 미학, 그 배려와 양보, 그리고 눈부신 희생으로 자라나겠지요. 이를 엄숙함으로 받들지라도 놀이와 하나 된 것이 아닌 한 가식일 따름입니다. 아, 부디 엄숙주의는 가라!(80-81쪽)


대략 나이 육십 즈음인 사람들은 그 부모를 세상에서 떠나보내고 자식을 슬하에서 떠나보냅니다. 장례식장과 혼례식장에 드나들 일이 잦습니다. 사실 어디를 가든 서로 다른 두 상념의 경계를 가로지르기 마련입니다. 장례식이라고 해서 마냥 슬픈 것만은 아닙니다. 혼례식이라고 해서 마냥 기쁜 것만도 아닙니다. 예식이라고 해서 마냥 엄숙한 것만은 아닙니다. 술잔이 오가는 식사 자리라고 해서 마냥 떠들썩하고 어수선한 것만도 아닙니다. 만감 교차 그 자체입니다.


나오는 음식은 장례식에 육개장, 혼례식에 갈비탕이라는 차이를 빼면 거의 전혀 차이가 없습니다. 육개장과 갈비탕의 차이가 얼마나 의미심장한지는 알 수 없거니와 사실 따지고 보면 이런 차이는 기원의 동시성을 지닌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저 상징적인 지표 이상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결국 손님, 그러니까 제3자에게 두 예식의 차이는 육개장과 갈비탕 정도로 귀결됩니다. 슬픔과 기쁨, 종말과 시작, 죽음과 삶의 차이란 ‘손님’ 눈으로 보면 이와 동일하지 않겠습니까.


인간의 삶은 엄숙한 의례와 질탕한 연희, 진지한 노동과 즐거운 놀이가 전후좌우로 엮이면서 영위됩니다. 영유아 때는 놀이로만 살아갑니다. 놀이가 노동입니다. 학습이 시작되면서 놀이와 노동은 분리되기 시작합니다. 직업을 가지면 놀이와 노동은 완전히 분리됩니다. 직업을 떠난 마지막 도정에서 인간은 다시 놀이의 삶으로 돌아옵니다. 놀이와 노동은 삶을 구성하는 필수불가결의 두 요소입니다. 놀이만이라면 삶은 광기입니다. 노동만이라면 삶은 우울 장애입니다.


놀이는 재미를 낳습니다. 재미는 삶을 달굽니다. 달구어진 삶은 삶을 부풀게 합니다. 부풀어진 삶은 삶을 높이 띄웁니다. 노동은 의미를 낳습니다. 의미는 삶을 식힙니다. 식혀진 삶은 삶을 든든하게 합니다. 든든해진 삶은 삶을 나지막이 가라앉힙니다. 뜨고 가라앉는 유연한 역동의 흐름이 탱탱한 균형미를 빚어낼 때 비로소 삶은 건강해집니다. 우리는 뜨지도 가라앉지도 않는 적요를 향하지 않습니다. 떠도 미치지 않고 가라앉아도 우울하지 않는 참된 자유를 원합니다.


지난 달 중순 <416가족의 밤> 행사에 갔다가 우연히 근처 식당에서 유족 몇 분이 식사하는 모습을 옆에서 보게 되었습니다. 도란도란 담소를 나누다가 누군가 농담을 던졌습니다. 일동은 구김 없이 웃음 밭으로 달려 나갔습니다. 식탁에는 서너 개의 술병이 놓여 있었습니다. 저는 그 풍경의 변방에서 작지만 포근한 안도의 힘으로 혼자 막걸리 잔을 기울였습니다. 아, 피눈물로 새끼를 가슴에 묻은 저들도 흔연히 웃어야 한다. 살아내야 하니까. 살아내야 덜 미안할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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