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 우울증 - 남성한의사, 여성우울증의 중심을 쏘다
강용원 지음 / 미래를소유한사람들(MSD미디어) / 2011년 1월
평점 :
절판



 ☸ 격정의 늪에 빠진 병·······

  모든 정신·······장애의 근저에는 과잉 각성된 감정, 즉 격정激情·emotionalism이 존재합니다.·······생애 초기에 우리는 감정으로서만 존재합니다.·······그러므로 이때 받는 상처는 오직 감정의 상처입니다. 결국 감정의 상처는 존재 전체의 상처가 되어버립니다. 존재 전체의 상처로 군림하면서 차후 인생의 정신세계를 쥐락펴락 하는 반갑지 않은 친구를 우리는 ‘격정’이라 부릅니다.

  이 격정이 우울증에서는 어떻게 나타날까요?·······우울증의 가장 깊은 곳에는 사람, 곧 사랑의 상실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울증 환자에게는 관계의 문제가 아킬레스건이 됩니다. 관계 가치에 매몰되는 것이지요. 관계 가치의 요체는 진정성입니다. 자기 부정의 다른 이름인 이 진정성이 또 하나의 격정이 되어 관계의 모든 부분을 제압해버립니다.·······

  인간이 관계적 존재인 건 맞습니다. 그러나 그 관계가 격정으로서의 진정성에 함몰된다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입니다. 관계·······과정에서 정치적 대립과 타협을 피해 갈 수 없습니다. 도저한 정치성, 그 치밀하고 냉정한 거래가 전제하고 있는 수완의 세계를 진정성만으로는 감당할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그 사실을 직시하는 게 우울증 치료의·······길입니다.” (77-79쪽)


10세 이전 어린 나이에 아버지와는 사별, 어머니와는 생이별을 한 40대 후반 남자 사람 하나가 있었습니다. 할머니 손에서 자랐으나 대부분 방치되거나 학대받았습니다. 학교 공부를 제대로 할 수 없어 대학 진학에 실패하고 직업 전선을 떠돌았습니다. 많은 시간 동안 그는 세상 바꾸겠다는 사람들과 함께했습니다. 언제 어디서나 진심어린 삶의 자세로 일관했습니다. 당연히 백전백패했습니다. 그러다가 신산한 삶의 벌판에서 술이 주는 위안 동굴을 발견했습니다. 동굴 속 위안은 얼마 못가 광기가 되어 뛰쳐나왔습니다. 병원에서 치료 받고 나온 뒤 삶을 바꾸어야겠다 싶어 버리고 떠난 어머니와 화해한 뒤 저를 찾아왔습니다. 그는 상담 받는 동안에도 변함없는 진정성을 보였습니다. 그 진정성이 실제 삶의 주된 동력으로 자리 잡지 못했다는 증거를 남기곤 하던 어느 날, 상담치료비를 뒤로 미루고 책 한 권을 빌어간 상태에서 갑자기 소식을 끊었습니다. 제법 시간이 흐른 뒤 편지 한 통이 날아왔습니다. 그 또한 진정성을 가득 담은 편지였습니다. 노동 현장에서 주운 크레파스로 썼다는 편지를 받아들고 저는 한참 먹먹함에 잠겨 있었습니다. 편지에서 한 약속은 다시 깨졌고 그는 또 다시 소식을 끊었습니다. 이번에는 제가 편지를 썼습니다. 그가 지닌 진정성이 그나마 삶의 작은 동력이 되기를 빌면서 말입니다. 상담치료비는 차치하고 가타부타 말 한 마디 없이 책 한 권만 달랑 돌아왔습니다. 물론 저는 돌아온 책에 그의 여전한 진정성이 담겨 있다고 생각합니다. 진정성을 확인하면 할수록 제 마음은 슬프고 아픕니다. 그가 진정성이라는 격정의 늪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허우적거리는 모습을 너무나도 선연하게 떠올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바로 제 지난날의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그 그림자가 아직도 제 영혼의 한가운데 똬리 틀고 앉아 있기 때문입니다.


진정성이라는 격정은 순수함의 경계를 넘어 순진함의 땅으로 들어갑니다. 순진함은 셈을 놓칩니다. 셈을 놓친 삶은 거듭되는 패배로 말미암아 무능에 빠집니다. 무능은 무책임으로 귀결됩니다. 무책임의 끝은·······. 그 끝에 이르지 않으려면 진정성의 사람은 대칭의 반대편 끝을 느끼고 알아차리고 받아들여야 합니다. 다름 아닌 전략성! 그러니까 이것은 진심어림과 마주한 계산력, 바로 그것입니다. 계산은 냉정한 것입니다. 냉정해야 정확합니다. 정확한 계산을 흩뜨리는 사회에서 수탈이 일어납니다. 수탈하는 사람은 자기 계산을 정확히 해 놓고 빼앗기는 사람에게 진심을 먹이로 던져주어 입을 막습니다. 이것이 이른바 진정성의 정치경제학입니다. 수탈당하는 사람에게 나타나는 과도한 진정성은 이미 그 자체로 뒤집어씌워진 병명, 아니 죄명입니다. 요즘 대한민국에 번지고 있는 ‘애국’이라는 것의 실체입니다. “사람, 곧 사랑의 상실”이 가져다준 고통에 시달리는 사람들에게 나타나는 슬프고 아픈 진정성의 본질이 또한 이런 것입니다. 우리는 이를 ‘우울증’이라 부릅니다. ‘애국’이 뒤집어씌워진 사람이든 ‘우울증’이 뒤집어씌워진 사람이든 격정으로서 진정성에서 벗어나기 위한 단 하나의 길은 자기 자신에게 냉정하고 정확한 계산능력이 없다는 사실을 있는 그대로 느끼고 알아차리고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수탈당하지 않는 건강한 영혼으로 살아가려면 진정성과 전략성, 그러니까 진심과 계산의 밀고 당기는 팽팽한 균형이 필수적이라는 진실을 수용해야 합니다. 빌어간 책에 대한 계산은 정확하게 했으나 아직 상담치료비에 대한 계산을 정확하게 하지 않은 그 분을 저는 포기하지 않고 기다릴 것입니다. 제가 포기하는 것은 제 영혼 한가운데 똬리 틀고 앉은 격정의 그림자를 외면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제가 포기하면 그 분 또한 그 자리에서 더는 나아가지 못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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