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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 우울증 - 남성한의사, 여성우울증의 중심을 쏘다
강용원 지음 / 미래를소유한사람들(MSD미디어) / 2011년 1월
평점 :
절판
☸ 하루의 삶을 지옥에서 출발하는 병·······
어린 시절부터 남들도 그러겠지 하며 지녀 온 오랜 습관이 하나 있었습니다. 아침에 잠에서 깬 직후 시간을 지옥처럼 느낀다는 것입니다. 삶의 무의미감이 엄습해 오면서 순간적으로 기분이 벼랑 아래로 곤두박질치는 이 현상이 내인성우울증의 진단 지표 증상 가운데 하나라는 사실을 알기까지 흘려보낸 세월은 참으로 길었습니다.
당연한 것처럼 견디고 있었지만, 그렇지 않았을 경우 하루의 삶을 어떤 마음으로 시작했을까 하고 생각해 보니 그 동안의 인고가 너무도 안타깝게 여겨지더군요. 요즘도 드문드문 이런 아침이 찾아와 안부를 전합니다만, 저는 나지막하게 노래를 흥얼거리는 것으로 그 인사를 받고는 합니다.·······
물론 마음에 진 짐은 여전히 있습니다. 물론 앞으로의 삶이 장밋빛인 것도 아닙니다. 허나 마음의 짐 없이 장밋빛 인생을 살아야만 천국 같은 아침을 맞는다면 그 누가 있어 세상의 온 아침이 생기로울 것입니까? 다들 짐을 지고 갑니다. 다들 회색빛 삶을 살아갑니다. 그 사이에 명멸하는 숱한 평가와 상념들이 생명의 본질은 아닌 것이지요.
지나온 지옥 아침의 시절, 아마도 이런 깨달음을 선취하며 견디지 않았을까 스스로에게 후한 점수를 줘 봅니다. 그리고 내일 아침은 지옥이 아니기를 바라기보다는 여실한 생명을 더욱 진하게 느낄 수 있는 시간이기를 바랍니다. 어제, 오늘, 그리고 내일 평범한 일상 속을 변함없이 걸어야 하는 벗이여, 부디 어떤 조건에서든 생기로운 아침 맞으시기를 바랍니다.(68-69쪽)
『안녕, 우울증』을 읽고 상담하러 오신 분들 가운데 이 ‘아침지옥’ 부분에 대한 공감을 말씀하시는 경우가 참 많았습니다. 그만큼 사무치는 경험이라는 뜻일 것입니다. 사실, 건강한 사람에게라도 이른 아침은 활력 넘치는 시간대라고 할 수 없습니다. 하루 중 체온과 혈당 수치가 가장 낮기 때문입니다. 우울증을 앓는 사람은 평소 저체온 상태인데다 대부분 수면의 질이 낮으므로 아침지옥 상태는 필연에 가깝습니다. 게다가 의미도 없고 재미도 없는 스물네 시간이 턱 괴고 앉아 물끄러미 자신을 건너다보며 기다리고 있다면 얼마나 아득하겠습니까. “아이고, 또 하루 살아야 하는구나!” 실제 이런 말이 어린 소년이었던 제 입에서 흘러나오는 것을 너무 여러 번 들은 기억이 납니다. 만일 이 말을 어른 누군가가 들었다면 실로 잔망스럽다고 나무랐을 것입니다. 세월이 갈수록 아침지옥은 꿈속에서 보는 시퍼런 물처럼 더욱 스산하고 기괴한 마음 풍경을 만들어내었습니다. 아침지옥이 우울증의 유력한 지표가 된다는 사실을 안 것은 40대 중반 한의대에 들어간 뒤였습니다. 한의대 6년은 다만 의학 공부 기간이 아니었고 생활기조로 자리 잡은 우울증과 우울증이 신체화한 질병인 혈관운동신경성비염을 스스로 고친 치료의 세월이었습니다. 이 치료가 끝난 직후 들이닥친 국가폭력 때문에 아침지옥은 심각한 불안의 모습으로 다시 찾아왔습니다. 모르고 살았던 시절에는 그러려니 하면서 견뎠는데 선연한 각성 상태에서 겪은 아침지옥은 형언할 수 없는 고통을 가져다주었습니다. 한의원을 빼앗기고 낭인으로 떠도는 동안 아침지옥의 기세는 더욱 사나워졌습니다. 한의원을 다시 일으키는 과정에서 사기를 당하고 파산 지경에 이르자 아침지옥은 극에 달했습니다. 마침내 두 손을 들었습니다. 처절한 패배를 철저히 수용했습니다. 삶의 거의 모든 국면에서 사실상 사망이 선고되었습니다. 기적은 이 사회적 죽음 뒤에 찾아왔습니다. 모든 것이 무너진 폐허의 지평선 위로 고요가 말갛게 떠올랐습니다. 더 이상 아침지옥은 없습니다. 살아가야 할 세상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직면하는 아침실재가 있을 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