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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 우울증 - 남성한의사, 여성우울증의 중심을 쏘다
강용원 지음 / 미래를소유한사람들(MSD미디어) / 2011년 1월
평점 :
절판
자신이 마음의 존재라는 사실을 알아차리고 산다는 것은 자신이 소통을 추구하는 존재라는 사실을 인정한다는 뜻입니다. 소통을 추구하는 존재는 마주선 마음 존재에 먼저 주의를 기울입니다. 그의 말을 듣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말합니다. 말을 엮고, 인격을 엮고, 삶을 엮습니다. 함께 도약합니다. 통섭입니다. 결국 마음의 존재로서 산다는 것은 통섭으로 열린 길을 가는 것입니다.
통섭으로 열린 길을 가는 의학의 주체는 환자 앞에 경청하는 존재로 섭니다. 병을 아는 지식으로 무장하고 그것을 고치기 위해 말부터 앞세우는 존재가 아닙니다. 환자 자신, 그 마음을 듣는, 그래서 그 인격과 삶에 참여하는 존재입니다. 병을 확인하고 약부터, 그리고 끝내 약이나 처방하는 자는 의사라고 할 수 없습니다. 병을 통해 사람과 삶을 만나 더 평화롭고 행복한 길을 함께 가도록 돕는 자만이 의사입니다.(51-52쪽)
남의 말을 전혀 귀담아 들으려 하지 않는 사람이 듣는 척하기 위해 미리 준비한 대본대로 대화의 모양새를 갖추고 쇼를 했다면 그를 어찌 생각해야 할까요? 그가 공인이라면 어찌 다루어야 할까요? 그가 최고 헌법기관이라면 대체 어떻게 처리해야 할까요? 오는 아침 대한민국 정부수반의 기자회견을 보고 드는 상념들입니다. 듣고서야 말을 제대로 내는 법이거늘······.
오직 자기 할 말만 하겠다는 것은 자기 말을 말이 아닌 것으로 만들겠다는 것입니다. 일방적인 말은 말의 형태를 띤 폭력일 따름입니다. 이 사실을 본인만 모릅니다. 그 무지로 말미암아 자기가 늘 옳다는 오만은 극단을 향해 치닫습니다. 극단의 오만은 결국 스스로를 파멸시킵니다. 그러나 문제는 그 파멸의 총구가 본인을 넘어 말 공동체 전체를 겨냥한다는 데 있습니다. 폭력범 하나에 대한 애증의 감정은 말초적인 것입니다. 준엄한 관심사는 공동체 전체의 생사입니다. 공동체 전체에 들이닥치는 파멸의 파발 소리, 들리시나요. 아직 들리지 않는다면 귀를 활짝 열고 들어야 합니다. 듣고서야 말을 제대로 내는 법 아닌가요.
이른바 대통령이라는 이름으로 국민의 말에 귀 기울이지 않는 것과 의사라는 이름으로 환자의 말에 귀 기울이지 않는 것은 서로 맞닿아 있습니다. 물론 전자는 권력의 허영 때문이고, 후자는 전문지식의 허영 때문이라는 차이가 존재하지만 폭력이라는 본질은 동일합니다. 저 또한 이런 함정 속으로 순식간에 미끄러져 내려가곤 합니다. 척 보면 알고, 아는 게 옳고, 옳으니 치료하겠다는 단순무식한 관성 때문입니다. 아무리 봐도 모르는 게 있습니다. 알아도 치료 못하는 것 또한 있습니다. 치료할 수 있다고 해서 그게 다가 아닌 경우도 많습니다. 이 모든 가능성에 귀를 기울이고 질문해야 합니다. 듣고서야 말을 제대로 내는 법입니다.
사실 어떤 대화 공동체든 거의 반드시 혼자 자기 말만 하려 드는 사람이 있게 마련입니다. 하다못해 평범한 술자리에서조차 어떤 한 사람 목소리만 들리는 경우가 많지 않던가요. 오늘 저녁 약속된 술자리가 있습니다. 이 자리에도 물론 그런 사람이 생길 것입니다. 제가 어찌 하면 좋겠습니까. 침묵은 폭력에 대한 비겁한 동조니까 말입니다. 듣고서 말을 제대로 내야 법이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