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의 증언 - 상처 입은 스토리텔러를 통해 생각하는 질병의 윤리학 카이로스총서 26
아서 프랭크 지음, 최은경 옮김 / 갈무리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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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하는 것은 신과 씨름하는 것이다.(338쪽)

  ·······상처는 타자의 고통 이야기를 듣기 위해 안쪽으로 열리고, 자기 자신의 이야기를 하기 위해 바깥쪽으로 열린다.(339-340쪽)


구약성서 창세기 제32장에는 하느님과 씨름하는 야곱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형 에서의 굶주림을 약점 잡아 팥죽 한 그릇으로 장자의 권리를 사취하고 아버지 이삭을 속여 축복을 가로챈 야곱이 오랜 타향살이를 끝내고 고향으로 돌아가는 여정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형 에서의 보복이 두려워 만반의 준비를 하고 가족을 먼저 보낸 뒤 홀로 얍복 강변에 머무르다 야곱은 하느님의 공격을 받습니다. 하느님은 그에게 치명적인 상해를 입힙니다. (환도 뼈를 부러뜨렸다는 것이 통속한 해석이지만 실제로는 생식 능력을 파괴한 상황으로 보는 것이 원의에 충실한 이해입니다. 구약성서 전통의 개념으로 보자면 이것은 한 인간의 죽음에 해당합니다.) 야곱이 이 치명적 상실과 고통을 견디고 받아들이자 하느님은 마침내 그를 인정합니다. 하느님의 인정은 야곱(발뒤꿈치)이라는 이름을 이스라엘(하느님이 싸운다/다스린다/보존한다)로 바꾸어주는 선포에서 절정을 이룹니다.


기독교 세계에서 축복사건의 귀감으로 널리 알려진 내러티브입니다. 그러나 통속주의 이해는 축복을 개인 기복의 차원으로 끌어내렸습니다. 이 내러티브에 가한 모욕입니다. 하느님과 씨름하여 이긴 사람 이야기의 고갱이는 축복 자체가 아닙니다. 기복은 더욱 아닙니다. 축복은 방편이고 변화가 요체입니다. 변화의 기축에는 죽음과 맞먹는 상실이 존재합니다. 축복의 대칭 지점에 놓인 극한의 상실, 그 고통을 주목하지 않으면 변화가 요체라는 진실도 놓치게 됩니다. ‘하느님의 사람’이라 자칭하는 모든 자들이 이 진실을 놓쳤기에 결국 하느님은 스스로 극한의 상실, 그 고통을 경험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이 바로 신약성서 복음서에 나오는 예수의 겟세마네동산 기도에 이은 골고다언덕 십자가 이야기입니다. 땀방울이 변하여 핏방울이 되도록 기도한 것, 십자가를 지고 올라 마침내 거기 달린 것은 얍복 강변 야곱의 씨름을 하느님 스스로 재현·완수한 사건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절대 관건의 한 이치를 만나게 됩니다. 하느님이 인간의 무지와 무능을 돕기 위해 스스로 인간이 되었다는 것보다 더 충격적이고 감동적인 진실은 하느님은 인간이 되고서야 자신의 존재 방식을 온전히 드러낼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초절정의 반전입니다. 인간이 하느님을 도운 사건! 하느님이 인간의 도움을 받은 사건은 인간이 몸의 존재로서 겪는 도저한 상실과 부정, 공포와 절망을 통해서 이루어졌습니다. 상처 입힌 하느님과 상처 입은 하느님이 만났습니다. 이로써 하느님은 비로소 쌍방향으로 열린 존재가 되었습니다. 일방적으로 전지전능하고 일방적으로 아가페를 베푸는 존재가 아님으로써 참다운 하느님이 된 것입니다. “상처는 타자의 고통 이야기를 듣기 위해 안쪽으로 열리고, 자기 자신의 이야기를 하기 위해 바깥쪽으로 열린다.” 사람의 말을 듣기도 하고 사람의 말을 하기도 합니다. 하느님의 말을 하기도 하고 하느님의 말을 듣기도 합니다.


씨름 이야기 코다에 이르렀습니다. 하느님과 야곱의 문답에 주의를 기울입니다. 네 이름이 무엇이냐? 야곱입니다. (발뒤꿈치, 곧 탐욕·계략입니다.) 이제 네 이름은 이스라엘이다. (하느님이 싸운다, 곧 탐욕·계략을 공격한다. 하느님이 다스린다, 곧 탐욕·계략을 무너뜨리고 공존·연대를 이룬다. 하느님이 보존한다, 곧 길이 공존·연대한다.) 당신의 이름은 무엇입니까? 무명이다. (무능, 곧 백전백패다.) 하느님이 야곱과 이름 문답을 주고받습니다. 하느님이 모를 리 없고 야곱이 모를 리 없는데 말입니다. 이것은 서로 존재 방식을 달리 하겠다는 상호 혁명의 약속입니다. 하느님은 나사렛 청년으로 와 십자가를 지고 죽음으로써 이 약속을 지켰습니다. 이제 야곱, 그러니까 우리 인간의 차례입니다. 이 약속을 지키기 위해 우리는 스스로 탐욕·계략을 쳐서 부러뜨려야 합니다. 야곱임을 기꺼이 부정해야 합니다. “존재하는 것은” 내 안에 스스로 있는 “신과 씨름하는 것”입니다.


웰빙과 힐링이 만연한 오늘날 모든 멘토는 말합니다. 우리 삶의 목표는 행복이라고. 그렇습니까? 그렇다면 그 행복이란 과연 무엇입니까? 통속한 멘토, 심지어 승려 등 종교 지도자조차 그것을 개인적 기쁨과 안녕 상태라고 말합니다. 그런 따위의 행복은 당최 존재하지 않습니다. 있다면 그것은 중독 상태일 따름입니다. 인간 생명은 연계된 전체로서 존재합니다. 타자를 듣기 위해 안으로 열리고 자기를 말하기 위해 밖으로 열리는 쌍방향 교감이 누락된 채, 홀로 느끼는 행복은 탐욕·계략의 속임수에 놀아난 부작용입니다. 부작용으로서 행복은 반드시 누군가의 것을 수탈한 결과입니다. 신자유주의 경전을 들고 자본이라는 ‘이름’을 지닌 하느님은 이 수탈을 성공이며 공공선이라 꼬드깁니다. 우리사회 지배층과 그 마름들은 이미 이 꼬드김에 다 넘어갔습니다. 그들은 지금 이 시각 제 손으로 죽인 아이들의 영혼 앞에서도 거짓말을 하고 있습니다. 한사코 야곱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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