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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의 증언 - 상처 입은 스토리텔러를 통해 생각하는 질병의 윤리학 ㅣ 카이로스총서 26
아서 프랭크 지음, 최은경 옮김 / 갈무리 / 2013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고통은 어떤 사람의 고통이든 환원불가능하다는 바로 그 이유로 쓸모가 없어진다. 고통은 현재의 상태 그것일 뿐이기 때문에 어떤 의미도 가질 수 없다. 환원 불가능한 고통은 결코 비교될 수 없다. 그러나 이 지점에서 그 주장은 원점으로 돌아온다. 고통이 비교 불가능하다는 것이 이해된다면, 같은 이야기 안에서 다른 고통들에 대하여 말하는 것은 비교를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가능하다.·······비교가 가능하지 않은 곳에서는 제유적인 여집합-‘환유적인 과다함’으로 번역된 것을 문맥을 고려하여 인용자가 바꿈.-이 있다. 각각의 고통은 더 커다란 전체의 일부분이다. 각각의 고통 받는 개인은 다른 고통들에 대한 목격자로서 그 전체로 부름 받는다.(333쪽)
세월호사건과 관련해 어느 정신과 의사와 인터뷰한 글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그 의사는 유족의 슬픔과 아픔에 대해 전혀 공감하지 못하는 정부 수반의 심리 상태를 이런 내용의 말로 설명했습니다.
“내가 겪은 고통은 너희의 그것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크다.”
이런 정도의 개인적인 이유 때문만은 아닐 터이니 그 분석에 공감하는 것과 사건의 본질을 이해하는 것은 전혀 별개의 문제임이 분명합니다. 하지만 남의 고통보다 제 고통을 크게 여기는 심리가 흔하다 못해 보편적이라는 사실 만큼은 분명합니다.
상담치료를 하다보면 거의 모든 경우 이런 상황과 마주칩니다. 마음병을 앓는 사람은 자기만 아프다거나, 자기가 가장 아프다고 생각합니다. 열이면 열 똑같이 이런 표현을 씁니다.
“내속을 누가 알겠어요.”
비교한다는 것은 환원 가능성이 있다는 것입니다. “환원 불가능한 고통은 결코 비교”할 수 없습니다. “고통은 어떤 사람의 고통이든 환원불가능”합니다. 누구의 고통이 누구의 고통보다 크다고 말하는 것은 편견이자 왜곡입니다. 내 고통이 남의 것보다 크다고 말하는 것은 유아적 자기연민입니다.
모두의 고통은 각각 “다른” 고통입니다. 다른 고통을 서로 말할 수 있는 것은 “같은 이야기 안에서” 라는 전제가 있기 때문입니다. 같은 이야기는 다시 “더 커다란 전체”를 전제합니다. 서로 다른 고통은 서로에게 은유의 당사자입니다. 서로 다른 수많은 고통은 더 커다란 전체와 제유-제유Synecdoche는 사물의 한 부분으로써 그 사물 전체를 의미하는 비유로, ‘사람이 빵만으로는 살 수 없다’라는 문장에서 ‘빵’이 ‘식량’을 의미하는 것 따위가 이에 해당함.-관계에 함께 섭니다. 제유 관계에 함께 설 때 각각의 고통은 서로 여집합의 일부가 됩니다. 바로 이런 일련의 이치에 터하여 다른 고통을 같은 이야기로 나눌 수 있는 것입니다. 단절은 연속의 계기입니다. 연속은 단절의 계기입니다. 이것이 다름 아닌 원효 성사의 화쟁입니다. 화쟁은 모두 다르다皆非와 모두 같다皆是 중 어느 하나를 누락시키지 않습니다. 전체 진실, 곧 일심一心 안에서 화쟁이 작동하기 때문입니다.
최근 국사 교과서 획일화 관련 민중시위 주도 혐의를 받고 수배 중이던 한상균 민주노총 위원장이 조계사에 피신해 있다가 무력으로 체포당하는 대신 자진 출두함으로써 사건이 일단락되었습니다. 내막이야 또 다를 테지만 이 문제 귀결의 중심에는 불교 화쟁위원회가 있었습니다. 말 그대로 그들은 원효의 화쟁정신을 이 시대 문제를 푸는 열쇠로 삼고 있습니다. 표방과 달리 그들은 화쟁을 오독했습니다. 그들은 입쟁을 잘못함으로써 파쟁을 그르쳤습니다. 수탈당하는 사람들의 고통보다 수탈자의 존재하지도 않는 고통이 더 크다는 비교(!)에 결과함으로써 ‘다른 고통 같은 이야기’의 기본을 도륙해버렸습니다. 사회철학의 부재는 차치하고 원효의 근본조차 부정한 실로 한심한 작태입니다.
오늘도, 자기만 아프고 자기가 세상에서 제일 아프다는 한 분의 이야기를 고요히 귀 기울여 들었습니다. 그는 제가 혼신의 힘으로 듣는 모습을 보면서 마음이 흔들렸음에 틀림없습니다. 저를 깊은 눈길로 바라보면서 참으로 궁금하다는 듯, 이렇게 물었습니다.
“선생님, 저만큼 아픈 사람이 저 말고 또 있었나요?”
제가 어떤 말을 해주니 그의 눈시울이 금세 젖어들었습니다. 이렇게 질문이라도 할 줄 알았다면 나라를 지금 꼴로 망치지는 않았을 사람들 얼굴이 주마등처럼 지나갑니다. 우리가, 이 슬프고 아픈 백성이 저들에게 무슨 말을 해주면 저들의 눈시울이 젖어들까요. 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