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의 증언 - 상처 입은 스토리텔러를 통해 생각하는 질병의 윤리학 카이로스총서 26
아서 프랭크 지음, 최은경 옮김 / 갈무리 / 2013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고통(은-인용자-)·······경험의 살아지는 흐름에 대한 (일상화된 혹은 재앙적인) 저항 과정의 결과·······다. 고통을 겪기 위해서는, 사람은 위협을 인식해야 할 뿐 아니라 그 위협에 저항해야 한다. 위협에 대한 인식은 이미 약한 형태의 저항이다. 경험의 살아온 흐름이 붕괴되었기 때문이다.·······이야기들을 말하는 것은 저항의 한 형태다. 이야기에서, 경험의 흐름은 숙고되고 되돌려진다. 자아-이야기를 통한 저항은 몸-자아를 재형성시킨다.(318쪽)


지난 1월 21일 『고통』(한스 게오르크 가다머)의 리뷰 <통증이 너희를 구원하리라>에서 고통과 통증 문제를 비교적 소상하게 말씀드린 바 있습니다. 그 맨 마지막 문단을 가져와보겠습니다.


“바야흐로 고통을 직시할 때가 왔습니다. 고통은 많은 경우, 아니 본질적으로 병이 아닙니다. 자연치유반응입니다. 무조건 없애려 하는 것은 의학이 아닙니다. 고통을 없애려면 고통을 북돋아주어야 한다는 역설을 모르는 한 의학은 반생명적 살인기술일 뿐입니다. 고통을 북돋우는 과정에서는 불편함을 견디는 전인격적 감응response 문제가 개입합니다. 전인격적 감응은 결코 관념의 문제가 아닙니다. 관념을 넘어서 실재의 세계로 가려면 몸의 아픔, 그러니까 통증의 위상을 바로 알아야 합니다. 통증은 일차적·근본적·범주적입니다. 무통의 전략과 편의의 전술로 승승장구하는 자본의 의학에 맞서 몸의 아픔을 화두로 들어야 합니다. 그게 괴로움의 함정을 벗어나는 바른 마음입니다.”


고통, 좀 더 정확히는 통증을 의학적 측면에서 자연치유반응으로 인식하고 전인격적인 감응을 해야 한다는 것이 요지입니다. 자연치유반응은 병의 “위협을 인식”하고 “그 위협에 저항”하는, 그러니까 병의 “흐름에 대한 저항”입니다. 위협을 인식하니까 저항하는 것입니다. 저항하니까 아픈 것입니다. 아프니까 불편한 것입니다. 아프고 불편한 것을 제거하면 생명의 위협을 인식하고 저항할 수 없게 됩니다. 아프고 불편한 것을 전인격적으로 감응하는 일은 생명에 대한 근본적 예의이며 경외입니다. 무통주의와 편의주의에 사로잡힌 현대문명은 정확히 이 진실을 뒤집어 놓은 것입니다.


좀 더 근원의 지점으로 들어가 볼 필요가 있습니다. 생명은 그 자체로 저항입니다. 그도 그럴 것이 생명 현상은 열역학 제2법칙, 그러니까 엔트로피 법칙을 거슬러 올라가는 활동이기 때문입니다. 태어나는 순간부터 죽음, 그러니까 해체적 열평형 상태를 향해 부단히 나아가는 것이 “경험의 살아지는 흐름”입니다. 생명체로서 살기 위한 활동은 바로 이 흐름에 맞서 구성적 열 순환 상태를 만들어가는 저항운동입니다.


저항의 내러티브를 통해 “경험의 흐름은 숙고되고 되돌려”집니다. 생명은 찰나마다 “재형성”됩니다. 흐름이 숙고되고 되돌려지는, 그러니까 가역적인 운동은 열역학 제2법칙이 지배하는 고립계에서는 일어날 수 없습니다. 재형성, 어림도 없습니다. 되돌리고 다시 빚는 일은 끊임없이 생명 사건을 개방계로 열어가는 행동입니다. 개방계로 열어가는 행동이 소통입니다. 소통은 생명을 광활함the spaciousness의 도상에 두는 것입니다. 광활함으로 가는 저항의 고통은, 그러므로 숭고 그 자체입니다. 숭고는 필연의 이치로 고통, 정확히는 통증을 끌어안고 있습니다.


좀 더 구체적이고 생생한 지점으로 들어가겠습니다. 엄마가 아기를 낳을 때만큼 아픈 일은 다시없을 것입니다. 흔히 산고産苦라 하지만 틀린 말입니다. 산통産痛이 맞습니다. 아기를 낳을 때 아프다고 해서 그것을 괴롭게 여기는 엄마는 없습니다. 아기를 낳는 일이야말로 전형적인 숙고입니다. 되돌림입니다. 재형성입니다. 아기를 낳는 일이야말로 숭고의 본진입니다.


이렇게 고통, 정확히 통증은 질병과 의학의 문제를 넘어 생명 전체를 관통하는 실재입니다. 통증은 천명입니다. 천명은 저항을 지시합니다. 무통은 저주입니다. 순응은 파멸입니다. 대한민국, 목하 무통과 순응에 깊이 잠겨가고 있습니다. 벗이여, 제발 아프시라! 그대여, 부디 저항하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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