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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의 증언 - 상처 입은 스토리텔러를 통해 생각하는 질병의 윤리학 ㅣ 카이로스총서 26
아서 프랭크 지음, 최은경 옮김 / 갈무리 / 2013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나는 캐나다 원주민들이 자신들의 이야기들을 말하는, 그리고 구술문화에서 산다는 것이 의미하는 바에 대해 말하는 것을 들었을 때, 그들이 이야기를 반복하여 말하는 것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이야기들이 반복해서 말해질 때 중요한 것은 그 내용으로부터 무엇을 배우는가가 아니다.·······그 이야기들을 듣는 과정에서 청자가 무엇이 되는가이다. 반복은 생성의 매개체다.(301쪽)
논어 첫머리의 저 유명한 문장, 학이시습지불역열호學而時習之不亦悅乎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이 읽어왔으나 미진한 바가 여전히 남아 있는 등하불명燈下不明의 문장입니다. 오늘 여기 아서 프랭크는 논어와 전혀 무관한 이야기 자리에서 그 어떤 해석가도 지니지 못했던 시선으로 학이시습지불역열호學而時習之不亦悅乎를 관통합니다.
그 동안 우리가 흔히 들어온 해석은 이렇습니다.
“배우고 때때로 익히면 또한 기쁘지 아니한가?”
익숙하지만 모호하고 모자란 해석입니다. 도올 김용옥은 ‘때때로’를 ‘때에 맞추어timely’로 이해합니다. 익힘習은 때에 맞게 해야 한다는 것이므로 가끔이란 의미도 가능한 ‘때때로’보다는 설득력을 더 갖추고 있음이 분명하지만 이런 이해 또한 정확한 것이 아닙니다.
도올은, 익힘習은 배움學과 병치된 독립된 개념이라 하면서, 배움學은 미지의 세계로의 던짐이라 하고, 익힘習은 실천의 세계라고 합니다. 학습學習의 내용은 육예六藝이니 같은 것을 배우고 익히는 두 행위로 표현한 것입니다. 그러나 도올의 이 구분은 어린아이가 서書, 수數는 할 수 있지만 사射·어御는 할 수 없다고 하거나, ‘배움의 익힘’과 ‘배우고 익힘’이라는 표현을 혼용함으로써 어지러워지고 맙니다. 구분을 엄밀히 하고 ‘때에 맞추어’ 하자면 배움 또한 그러할 것인데 하필 익힘에만 적용하는 것도 이치에 맞지 않습니다. 결국 배움과 익힘의 관계를 깊이 따지지 않아서 일어난 잘못입니다. 이런 잘못으로 지之는 투명 글자 취급을 받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 모든 잘못을 바로잡으려면 이렇게 읽어야 합니다.
“배우고 그 (배우기)를 수시로 (반복하여) 익히면 또한 기쁘지 아니한가?”
배우기를 반복하는 것이 익힘입니다. 반복은 그저 배우기를 되풀이하는 것이 아닙니다. 반복의 익힘을 통해 배우기가 몸에 새겨집니다. 몸에 새겨진 바는 인격을 빚어갑니다. 반복은 나선형 전진이며 집장集藏입니다.
“이야기들이 반복해서 말해질 때 중요한 것은 그 내용으로부터 무엇을 배우는가가 아니다.·······그 이야기들을 듣는 과정에서 청자가 무엇이 되는가이다. 반복은 생성의 매개체다.”
반복은 “무엇이 되는가”의 문제입니다. 반복은 “생성”의 문제입니다.
상담으로 마음병을 치유하다보면 반드시 이 반복의 문제와 마주칩니다. 마음병에 걸린 사람들은 이야기를 반복해서 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 때마다 아프고 지긋지긋하고 진절머리 나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 기적처럼 빨리 낫기를 고대하기 때문입니다. 더는 이야기하기 싫어 정나미가 똑 떨어질 때, 여태까지 한 이야기를 두 곱 더 반복하면 길이 열립니다. 병이 생성되듯 치유도 생성되는 것입니다. 생성되려면 반복 또 반복해야 합니다. 반복을 축복으로 경험하기 위해서는 견딤의 터널을 지나가야 합니다. 오늘 우리는 598번의 반복을 견디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