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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의 증언 - 상처 입은 스토리텔러를 통해 생각하는 질병의 윤리학 ㅣ 카이로스총서 26
아서 프랭크 지음, 최은경 옮김 / 갈무리 / 2013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증언은 그것이 억압될 때조차도 압도-이 부분을 제외한 나머지 모든 부분에서 압도로 번역된 것을 인용자가 문맥을 고려해 억압으로 바꿈-하는 효과를 가지고 있다.(267쪽)
·······증언은 ·······조각조각의 서사로 말한다. 이 조각조각은 “억압당한” 의식이 다룰 수 있는 전부다. 거대 서사는 경험을,·······“온전한 인식”으로 동화시킬 능력이 있다고 주장하는 주권의식의 작동이다. 이러한 주권은 현존하는 준거 틀에 들어맞는 경험들에 의존하고 있다.
·······이제 사건들은 그 준거 틀을 초과하여 발생하고, 그렇게 발생하는 것으로 인식된다.·······(268쪽)
·······억압된 기억의 저 밑-근원이라고 번역된 것을 인용자가 문맥을 고려하여 바꿈-에는 억압된 몸이 있다.·······몸은·······모든 언어를 초과한다.(269쪽)
몸과 그 움직임에서 인간의 언어가 비롯되었습니다. 언어는 사유의 근거이자 수단입니다. 사유는 언어를 넘어서지 못합니다. 언어는 몸을 넘어서지 못합니다. 몸 자체에 간직된 경험과 기억, 무엇보다 상처는, 그러니까 “언어를 초과”하는 고통은 치유하기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아니 치유가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고백해야 합니다. “온전한 인식으로 동화시킬 능력” 지닌 그 어떤 서사도 없습니다. 그 능력이라고 “주장하는 주권의식의 작동” 자체가 “억압”입니다. 억압은 온전한 인식을 동화 아닌 이화, 그러니까 “조각조각”으로 나누어버립니다. 나뉘면 달라집니다. 달라지면 어긋나기 마련입니다. 어긋나는 조각조각의 서사를 만나게 하려면 언어의 행간을 살펴야 합니다. 언어의 행간은 언어와 언어 사이입니다. 언어와 언어 사이에는 몸이 있습니다. 몸을 느끼고 움직일 때, “증언은 그것이 억압될 때조차도 압도하는 효과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우울증으로 고통 받는 사람이 찾아옵니다. 통속의 평범한 양의사는 뇌를 통한 심리 진단만 하고 프로작 따위의 화학 합성 약물을 처방합니다. 통속의 평범한 한의사는 맥을 통한 신체 진단만 하고 귀비탕 따위의 천연 복합 약물을 처방합니다. 통속하지 않되 평범한 양의사나 한의사는 심신상관적인 진단을 하지만 통섭의 치료를 구사하지 못합니다. 통속하지도 평범하지도 않은 한의사-이런 양의사는 존재하지 않음-는 심신상관적인 진단을 하고 통섭의 치료를 구사합니다.
우울증은 소위 DSM 시리즈가 규정하듯 단순한 정신, 특히 기분장애가 아닙니다. 우울증은 육체에 뿌리를 내리고 있습니다. 마음은 몸의 마음인 것이 당연합니다. 그 반대의 경우도 동일합니다. 통속하고 평범한 양의학도 한의학도 모두 한쪽으로 치우쳐 있습니다. 양의학은 우울증의 몸, 특히 내과적 치료에 무관심·무능력합니다. 한의학은 우울증의 마음, 특히 언어적 치료에 무관심·무능력합니다. 물론 더욱 큰 문제는 헤게모니 의학인 주류 양의학의 무관심·무능력함입니다.
저 또한 이런 한계에서 자유롭지 못한 통속하고 평범한 한의사입니다. 통속하고 평범한 상태에서 벗어나기 위해 끊임없이 애쓰고 있을 따름입니다. 제 경우, 몸 진단을 세밀하게 합니다. 복부 진단을 주축으로 하고 경추 진단을 반드시 추가합니다. 복부 진단은 한의사들도 소수만이 행합니다. 경추 진단은 한의사들 거의 모두가 하지 않습니다. 마음 진단의 경우, 직접 문진과 설문 진단을 병행합니다. 증거가 모호할 때, 뇌 중심 신체검사를 통해 신경내분비 장애를 진단합니다. 치료는 상담, 수기, 운동지도, 침, 뜸, 온열, 한약을 필요에 따라 적절히 씁니다. 한의사인 처지를 감안하여 상담치료에 극진히 공들입니다. 인문치료의 영역으로까지 나아갑니다(숙담, 숙론 치료). 최근 들어 가장 관심을 기울이는 바는 모든 치료, 특히 언어적 치료의 기운-이 단어 쓰기가 좀 민망합니다만-이 몸으로 수렴되도록 하는 것입니다. 치료로서 증언을 초과한 몸에 귀 기울이기 위함입니다.
오늘 아침 황현산 선생이 트위터에 올린 글 전문을 인용합니다. “어떤 사람에게서, 지나치게 딱딱한 표정과 끊어 읽는 듯한 말투, 늘 갈아입으면서도 로봇 같은 옷차림, 과격하고 단호한 말투 등등은 자신의 음란함에 대한 죄책감의 결과일 수 있다.” 올바른 역사교육을 받지 못해 혼이 비정상인 사람들은 ‘그 어떤 사람’이 누구인지 모를 리 없습니다. ‘그 어떤 사람’의 증언이 압도적인 효과를 발휘하는 까닭은 그것이 증언의 언어와 비언어적 뉘앙스를 초과한 몸에서 비롯하였기 때문입니다. 이 압도적인 음란함과 음산함의 어둠에 맞서 빛 된 사람들은 어떤 증언을 해야 할까요. 바다에 빠뜨려 죽임 당한 자식 때문에 찢겨진 몸, 진실을 요구하다 빨갱이로 몰려 갇힌 몸, 역사 쿠데타를 막으려다 물대포 맞아 죽음 30cm 앞에 선 몸으로 드러내는 절규·비명·신음·욕설보다 더 압도적인 증언이 다시없지 않을까요. 저와 당신은 어떻게 “모든 언어를 초과”하는 몸으로 살고 있는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