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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의 증언 - 상처 입은 스토리텔러를 통해 생각하는 질병의 윤리학 ㅣ 카이로스총서 26
아서 프랭크 지음, 최은경 옮김 / 갈무리 / 2013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인간이 필멸을 공통적인 것으로 받아들이고 그것을 두려워하지 않게 되는 유일한 방법은 우리의 공통적인 필멸을 드러내는 것이다.·······“내가 한 때 죽음을 삶의 과정으로 직면했다면, 내게 두려워할 그 무엇이 있겠는가? 내게 다시 한 번 권력을 행사할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237쪽)
가수 윤선애의 노래 <하산> 후반부 가사는 이렇습니다.
“영원히 산다면 세상은 이리 아름답지 않아.
스스로 간절한 줄 모르는 빛일 뿐이지.
세상을 포옹하는 늦은 하산
발걸음은 어둔 산에 묻히고
삶이 저 아래 사람들 사는 곳으로 이어진다.”
그렇습니다. 인간은 “필멸”의 존재입니다. 필멸하기 때문에 삶이 간절해집니다. 간절하게 살기 때문에 세상은 아름답습니다. 아름다운 세상에서 필멸의 존재들이 더불어 살아갑니다. 더불어 살아가는 필멸의 존재들은 하나하나 특별합니다. 하나하나 특별하므로 서로서로 각별합니다. 서로서로 각별한 존재는 서로서로 “드러내는” 존재입니다. 드러내면 두려움에 사로잡히지 않습니다. 두려움에 사로잡히지 않게 되었을 때 가장 먼저 맞서야 할 것은 “권력”입니다. 권력은 필멸에 대한 두려움을 복원하려고 은폐를 통치 프레임으로 세웁니다. 은폐는 각별한 존재 사이를 갈라놓습니다. 갈라진 각별한 존재는 서로의 특별함을 공격합니다. 특별함이 파괴된 존재들은 뿔뿔이 흩어집니다. 뿔뿔이 흩어진 존재들이 나뒹구는 세상이 아름다울 리 없습니다. 아름답지 않은 세상을 누가 간절함으로 살아갈 것입니까. 간절함 잃은 세상은 필멸공포 초일극의 질곡 아래 신음할 것입니다.
시인 김소연은 신문 글 <청맹과니>에서 11.14집회를 철저히 은폐하는 권력과 그 주구인 관제 언론이 촉발시키는 무서움, 그 느낌인 두려움을 이렇게 토로하였습니다.
“집회가 왜 열렸는지, 집회의 중요한 구호는 어떤 것이었는지를 밝히지 않는 언론들이 무서웠다. 집회에 참가한 농부가 경찰의 물대포에 맞아 의식을 잃게 됐다는 사실도 내가 꼭 알아야 하는 사실이지만, 그가 왜 집회에 참가하게 되었는지, 그 절박한 이유를 꼭 알고 싶다. 알고 싶고, 알아야 하는 것들을 제대로 알지 못하도록, 정보에 차벽을 치는 언론이 무섭다. 광장에 차벽을 치고 시민에게 물대포를 쏘는 공권력만큼이나 무섭다. 며칠 사이에 일어난 이 일들을 제대로 이해하는 데에 가장 방해가 되는 것이 티브이와 신문이라는 사실이, 이미 그런 줄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점점 더 무서워진다.”
무서움, 그 느낌인 두려움은 은밀하게 필멸로 스며들 것입니다. 차벽을 부수고 필멸을 가차 없이 드러내야 합니다. 필멸을 가차 없이 드러내는 순간, 두려움의 에너지는 혁명의 타격으로 전화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