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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의 증언 - 상처 입은 스토리텔러를 통해 생각하는 질병의 윤리학 ㅣ 카이로스총서 26
아서 프랭크 지음, 최은경 옮김 / 갈무리 / 2013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사회는 사회적 진단보다 의학적 진단을 선호한다. 의학적 진단은 치료를 승인하는 반면, 사회적 진단은 그 사회체제가 자신의 일부로 포함시키는 것의 전제들에 대하여 광범위한 변화를 요구한다.(223쪽)
서구 전통에서는 신학, 법학, 그리고 의학을 3대 신성학문이라고 합니다. 물론 그 정점은 신학입니다. 사제, 법관, 그리고 의사는 공식 업무 중에 가운을 입습니다. 신을 대리한다는 상징적 표시입니다. 신성을 담는다는 것은 불변한다는 것입니다. 3대 신성학문의 패러다임은 일단 확립되면 좀처럼 변하지 않습니다.
신학, 법학, 그리고 의학이 기본적으로 체계의 단단함을 중시할 수밖에 없다는 것은 이해할만합니다. 인간 존재의 근원과 생명을 좌우하는 기준이 되기 때문입니다. 이를테면 근본성을 확보하고 있어야 하기에 말입니다. 문제는 이것이 그대로 사제, 법관, 그리고 의사의 정치적 보수성과 연결된다는 데 있습니다.
근본성radicality은 급진성radicality과 같은 말입니다. 문제의 근본을 참으로 깨달았다면 급진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궁극적으로 타협이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고타마 싯다르타의 출가가 그러합니다. 나사렛 예수의 십자가가 그러합니다. 사제, 법관, 그리고 의사의 정치적 보수성은 협잡의 산물임이 분명합니다.
협잡의 근원은 돈과 권력에 대한 탐욕입니다. 이치상 사제, 법관, 그리고 의사는 권력과 돈에서 가장 멀리 있어야 하는 직업입니다. 자본주의 사회, 특히 우리 현실은 정반대의 풍경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돈에 눈멀고 권력의 개 노릇하는 사제, 법관, 그리고 의사가 대박 나는 일을 너무나 자주 목도하고 있습니다.
사제, 법관에 대해서는 다른 기회에 더 말씀드리기로 하고 의사 이야기만 부연하려 합니다. 대한민국에서 의사, 정확히는 양의사 집단은 가히 최고의 주류 집단입니다. 이들은 근현대사의 굴절 속에서 단 한 번도 핍박받지 않고 특권을 누려온 매판독재세력의 고급 부역 집단입니다. 대부분 이 사실조차 모르고 있습니다.
이들은 세상 바뀌는 것을 결코 바라지 않습니다. 오로지 지금 세상 아래서 더 많은 권력으로 환자 위에 군림하고, 더 많은 돈으로 호사 누리며 살았으면 하는 생각뿐입니다. 그들에게 치료란 바로 그 탐욕을 채우는 도구에 지나지 않습니다. 기득권체제를 유지하고 확산하기 위한 관리 방식이자 재생산 메커니즘입니다.
지금, 집권 세력은 의료 민영화나 중독법 등을 통해 의사와 아픈 사람들을 장악하듯, 역사교과서 단일화를 통해 교사와 아이들을 장악하려 합니다. 교육과 의료는 시민을 건강하고 성숙하게 길러내는 과정으로서 양육이라는 공통점을 지닙니다. 집권 세력은 이 문제의 결정적 중요성을 간파하고 독수를 들이대는 것입니다.
이 소용돌이는 분명 의학계에 일대 각성을 촉구하고 있습니다. 의학적 진단에 매몰되어 매판독재 세력의 주구 노릇하는 죄를 더 이상 범해서는 안 됩니다. 가운을 벗고 시민으로 문제 한가운데 서야 합니다. 국가라는 이름의 도적떼가 무슨 짓을 하는지, 그 짓으로 망가진 사회를 어찌 변화시켜야 하는지 고민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