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의 증언 - 상처 입은 스토리텔러를 통해 생각하는 질병의 윤리학 카이로스총서 26
아서 프랭크 지음, 최은경 옮김 / 갈무리 / 2013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나는·······어느 초등학교 5학년 학급으로부터 내 책들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학생들의 질문에 답변해달라는 초대를 받은 적이 있다. 반장인 듯 또록또록해 보이는 한 소년이 내게 예의 그 익숙한 질문을 했다. “왜 도망치지 않으셨어요?” 나는·······설명했다. 별로 납득이 되지 않은 소년은 내게 감시탑과 출입문들, 철조망과 발전소의 위치를 넣어서 수용소의 약도를 칠판에 그려달라고 했다.·······나는 최선을 다해 그려보였다. 소년은 몇 초간 약도를 찬찬히 살펴보고는 좀 더 구체적으로 몇 가지를 요구하더니 나에게 자신이 생각해낸 계획을 말했다. 여기서 밤중에 보초의 목을 친 다음, 그의 옷을 입고, 곧바로 발전소로 달려가서 전기를 차단한다. 그러면 탐조등이 꺼질 것이고 고압전류의 철조망에도 전기가 흐르지 않을 것이다. 그러고 나서 걱정 없이 나가면 된다, 라는 것이었다. 소년은 진지하게 덧붙였다. “다음에 또 이런 일이 생기면 제가 말씀드린 대로 하세요. 꼭 성공하실 거예요.”(191-192쪽)


이 인용문은 프리모 레비의「가라앉은 자와 구조된 자」일부분입니다. 「몸의 증언」 저자는 이 대목에 근거를 두고 다음 구절을 썼습니다.


어떤 혼돈의 바깥에 있는 우리 모두는 그 안에 빠졌을 때 우리가 빠져나올 수 있다고 안심하고 싶어 한다. 그러나 혼돈의 서사는 그러한 협상의 너머에 있다. 나올 방법은 없다.(205쪽)


우울과 불안이 단단히 얽혀 있는 한 젊은이가 찾아왔습니다. 그는 격정 상태에서 누구와 싸운 이야기부터 꺼냈습니다. 들어보니 그 이야기의 결정적 부분이 누락되어 있습니다. 기억이 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공포든 분노든 우울이든 혼돈의 절정에서 명료한 정신 상태를 유지하는 일은 불가능합니다. 기억에 앞서 주의, 집중, 판단, 절제·······모든 능력이 붕괴됩니다. 술에 만취되어 모든 정신 작용이 헝클어지고 그 기억마저 잃어버리는 blackout과 은유 이상의 일치 관계에 있을 것입니다.


그 젊은이에게 앞으로는 싸울 때 정신 똑바로 차리고 무슨 말을 했는지 기억해내라고 말하는 것은 저 프리모 레비의 초등학교 5학년짜리 소년이 이렇게 말한 것과 100% 같은 수준입니다.


“다음에 또 이런 일이 생기면 제가 말씀드린 대로 하세요. 꼭 성공하실 거예요.”


혼돈의 바깥에 있는” 사람은 “빠져나올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장기판 훈수처럼 승부의 당사자는 보지 못하는 것을 제3자라면 하수라도 볼 수 있다는 사실의 한 측면이 없지 않습니다. 더 중요한 것은 혼돈의 와중에 있는 사람이 휘말릴 수밖에 없는 격정 상태를 혼돈의 바깥에서는 전혀 감지할 수 없다는 사실의 측면입니다. 이 측면을 도외시하면 “나올 방법은 없다.”는 진실에 단 한 걸음도 다가설 수 없습니다. 도외시의 사람들은 언제나 빠져나오지 못했는가, 아니 않았는가, 그 나태함을 힐난합니다. 이 힐난은 혼돈에 빠진 사람에게 내면화됩니다. 스스로 꾸짖으며 죄책감을 더해갑니다. 혼돈은 증폭일로로 나아갑니다.


그 젊은이에게 그의 이야기에 결정적 부분이 누락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있는 그대로 느끼고 알아차리고 받아들이라 말해주었습니다. 그럴만했으며, 그 상태로 그 당시 100점이라 말해주었습니다. 이렇게 자인自認 감정, 자인 의식, 자인 의지를 디딤돌 삼아야 비로소 빠져나오는 방법을 스스로 찾을 수 있습니다. 바깥에서 대뜸 방법론부터 제시해준다고 해서 그 방법론이 혼돈에 빠진 사람의 실제 방법으로 제꺽 작동하는 것은 아닙니다. 의사도 바깥의 사람임에 틀림없습니다. 치료의 의욕보다 바깥의 사람으로서 지켜야 할 예의부터 갖추어야 하기에 제 처방은 언제나 조언이라는 이름으로 불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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