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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의 증언 - 상처 입은 스토리텔러를 통해 생각하는 질병의 윤리학 ㅣ 카이로스총서 26
아서 프랭크 지음, 최은경 옮김 / 갈무리 / 2013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진짜 증인들은 우리 생존자가 아니다.·······바닥을 친 사람들·······은 증언하러 돌아오지 못했·······다. 그러나 그들이 바로·······가라앉은 자들, 완전한 증인들이고, 자신들의 증언이 일반적인 의미를 지녔을 사람들이다. 그들이 원칙이고 우리는 예외다.·······
········최후의 말살, 그 완결된 작업에 대해서는 아무도 말하지 않았다. 자신의 죽음에 대해 말하기 위해 돌아온 사람이 아무도 없었던 것처럼 말이다. 가라앉은 사람들은 설령 종이와 펜이 있었다 하더라도 증언하지 못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의 죽음은 육신의 죽음에 앞서 시작되었기 때문이다.(98-99쪽)
이 인용문은 프리모 레비의「가라앉은 자와 구조된 자」일부분입니다. 「몸의 증언」 저자는 프리모 레비를 떠올리며 다음 구절을 썼을 것입니다.
홀로코스트 목격자들이 말하는 이야기들 속에·······채워지지 않는·······봉합될 수 없는 서사의 구멍이 있(인용자가 더함)다. 이야기는 주위를 맴돌면서 말해질 수(밖에-인용자가 뺌) 없는 상처의 가장자리를 추적한다. 그 이야기의 언어는 생생함을 말해주지만, 상처는 언어가 실패할 수밖에 없는, 몸의 상처이자 모욕, 고통, 상실이다.
·······이야기의 화자는 분명히 상처 입은 스토리텔러다. 그러나 진정으로 혼돈을 살아가는 사람들은 언어로 말을 할 수 없다. 혼돈을 구술 이야기로 전환하는 것은 그 이야기를 어느 정도 성찰적으로 부여잡은 것이다.(197-198쪽)
프리모 레비가 말한 “바닥을 친 사람들”, “최후의 말살”을 당한 사람들은 여기 “진정으로 혼돈을 살아가는 사람들”과 같은 존재입니다. 이들의 “상처는 언어가 실패할 수밖에 없는, 몸의 상처이자 모욕, 고통, 상실”입니다. 이들 앞에 “설령 종이와 펜이 있었다 하더라도 증언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죽음은 육신의 죽음에 앞서 시작되었기 때문”입니다. 그 “완전한 증인들”은 “말해질 수 없는 상처” 자체입니다. “채워지지 않는·······봉합될 수 없는 서사의 구멍”입니다. “성찰적으로 부여잡은” 모든 이야기들은 “가장자리를 추적”하는 노력일 뿐입니다.
가장자리 추적은 이야기하는 사람에게 결코 돌파할 수 없는 한계이자 지상의 책임입니다. 끝내 도달하지 못할 줄 알면서도 끝까지 가야 하는 여정입니다. 혼돈과 죽음이라는 고통의 실체를 추적하는 것이 아니라 혼돈과 죽음을 야기한 조건을 추적함으로써 혼돈과 죽음으로 내몰린 사람들을 기억하려는 공동체적 제의입니다.
지금 우리 공동체는 무도함의 무저갱으로 떨어져 내리고 있습니다. 아무리 현실정치란 것이 본디 그렇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사람의 일인데 어떻게 이런 지경으로까지 사악하고 파렴치할 수 있는지 기가 막힐 노릇입니다. 국가보호장비로 등록된 배에 아이들 250명을 가두어 죽음으로 몰아넣더니, 이제는 국정국사교과서로 아이들을 혼돈으로 몰아넣으려고 광분하고 있습니다. 문득 깊은 의문이 하나 솟아오릅니다.
“저들은 왜 이토록 아이들을 공격하는가?”
명확한 답을 찾지 못한 상황에서 소름끼치는 글 하나를 목도합니다.
“수험생 여러분,
우리나라의 미래를 짊어질 여러분은
통일시대를 이끌어 갈 미래의 기둥입니다.
새로운 미래는 여러분이 만들어가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꿈과 희망이 이뤄지길 응원합니다.”
수능 이틀 전 최고 통치자가 친필로 페이스북에 올린 응원 글입니다. 대체 이 응원의 정체는 무엇일까요? 이 응원이 시험 칠 수조차 없는 250명 아이들과 그 부모들 가슴에 무슨 의미일까요? 친구 250명을 잃은 단원고등학교 3학년 아이들에게 어떤 힘을 줄까요? 고3 수험생임에도 국정국사교과서 반대하기 위해 일인시위에 나선 아이에게 어떤 힘을 줄까요? 우주의 기운이 와서 혼을 정상화시키면 정말 시험을 잘 칠 수 있을까요?
오늘 여기를 살아가는 우리 어른들은 준열하게 자문해야 합니다. 매판독재 권력이 천인공노할 범죄를 저지르는 동안 우리 어른들은 과연 무엇을 한 것인지. 오늘 여기를 살아가는 우리 어른들은 준엄하게 깨달아야 합니다. 우리 눈앞에서 죽음과 혼돈으로 내몰리는 아이들,
“그들이 원칙이고 우리는 예외다.”
라는 사실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