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의 증언 - 상처 입은 스토리텔러를 통해 생각하는 질병의 윤리학 카이로스총서 26
아서 프랭크 지음, 최은경 옮김 / 갈무리 / 2013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여행은 경계를 지나간다. 반대편에 다다랐을 때, 여행객은 같은 가방을 든 같은 사람이다. 그러나 어떤 특정한 경계를 지나고 나면, 그 여행객은 새로운 정체성을 띠게 된다. 같은 가방은 이제 새로운 목적을 갖게 된다. 삶에 특정한 의미를 부여하던 근본적인 전제들은 바뀌어 있다.(43쪽)


우리사회가 근현대 이행 과정을 파국적으로 경험하면서 맞닥뜨린 수많은 혼동들이 있습니다. 그 가운데 하나가 관광과 여행을 구분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식민지와 개발독재 시대의 부역자들이 퍼뜨린 천박한 소비문화에 관광을 빼놓을 수 없습니다. 관광은 좋은 풍광을 즐기는 일종의 향락입니다. 관광은 변화의 모멘트로 작용하지 않습니다. 잠시 경계를 건너가 다른 것을 보고觀 돌아오면 종전의 정체성은 강화되어 있습니다. 하여 관광은 다른 사람에게 자랑거리가 됩니다.


여행은 향락이 아닙니다. 여행은 변화의 모멘트로 작용합니다. 여행은 “어떤 특정한 경계를 지나고 나면,” 여행객으로 하여금 “새로운 정체성을 띠게” 합니다. 하여 여행은 여행객에게 자성의 근거가 됩니다.


부박한 부자들은 목하 관광을 즐기면서 여행이라고 떠벌입니다. 가난한 사람들은 어렵사리 마련한 여행의 기회를 관광으로 소진하고 돌아옵니다. 이는 우리사회가 “새로운 목적을 갖”고 “근본적인 전제들”을 바꾸지 못한 채 퇴행하는 한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습니다. 인간의 삶은 의미와 재미의 두 바퀴로 굴러갑니다. 어느 한 쪽, 특히 재미 쪽으로 치우치는 것은 병입니다. 둘을 혼동하는 것은 타락입니다. 우리사회는 병들었고 타락했습니다.


병들고 타락한 사회에서 지배집단은 자기 정체성, 그러니까 권력과 재력을 강화하기 위해 끊임없이 희생양을 만들어냅니다. 영화 <변호인> 때문에 널리 알려지게 된 ‘부림사건’의 용공조작 검사, 저 악명 높은 고영주가 총선을 앞두고 온갖 사람들을 빨갱이로 몰아가며 매카시즘 관광에 한창 재미 들려 있습니다. 이 관광을 무슨 자랑거리로 삼을지는 모르지만 필경 그 자랑으로 말미암아 그의 병과 타락은 극에 달할 것입니다. 극에 달한 병과 타락은 그를 휴먼스케일 밖으로 길이 이탈하게 할 것입니다.


여행은 경계를 지나갑니다. 반대편에 다다랐을 때, 여행객은 같은 가방을 든 같은 사람입니다. 그러나 어떤 특정한 경계를 지나고 나면, 그 여행객은 새로운 정체성을 띠게 됩니다. 같은 가방은 이제 새로운 목적을 갖게 됩니다. 삶에 특정한 의미를 부여하던 근본적인 전제들은 바뀌어 있습니다. 이것이 인생입니다. 이 인생 과정이 인간입니다. 인간이라면 여행하는 인간homo viatro으로서 살아가야 합니다. 여행객에게는 권좌도 없고 금고도 없습니다.


바로 이 순간, 우리 내면에 어떤 고영주가 있는지 들여다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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