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리정치 - 신자유주의의 통치술
한병철 지음, 김태환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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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언젠가 그리스에서 매우 범상치 않은 사건이 보도된 적이 있다.·······그것은 뚜렷한 상징성을 띤 사건이었다. 미래에서 온 신호처럼 느껴지는 사건. 아이들이 무너진 집터에서 고액의 지폐 뭉치를 주웠다. 아이들은 그 지폐를 완전히 다른 용도로 사용했다. 그들은 지폐를 가지고 놀다가 찢어버렸던 것이다.·······

  ·······아이들은 돈을·······놀이를 위해 사용함으로써 돈을 세속화한다. 세속화는 오늘날 너무나 물신화된 돈을 일거에 세속적 장난감으로 변신시킨다.

  ·······세속화는 자유의 실천이며, 우리를 초월성에서, 모든 형태의 예속화에서 해방시킨다. 그리하여 세속화는 내재성의 놀이 공간을 열어준다.(75-77쪽)


공포와 당혹에 순간적으로 휘감기며 옴짝달싹할 수 없었던 10대 초반의 한 기억이 있습니다. 어느 날 아버지의 지인이 방문했습니다. 대화중에 고향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아버지는 고향집에 가려면 대관령을 넘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저는 무심히 의문을 제기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제 고향은 평창군 진부면의 산골마을이었으니 말입니다. 잠시 후 아버지는 조용히 저를 불러내셨습니다. 집 뒤편으로 돌아서자마자 따귀에서 번갯불이 번쩍하고 천둥소리가 쾅하고 터졌습니다. 놀라서 아버지의 얼굴을 쳐다보았는데 그런 성난 모습은 난생 처음이었습니다. 가타부타 말 한 마디 없이 아버지는 돌아서 들어가셨습니다. 저는 한 동안 거기서 움직이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오랫동안 제가 왜 맞았는지 알지 못했습니다. 한참 지난 다음에야 아버지가 서울의 지인들한테는 고향을 강릉시라고 말씀하셨다는 사실, 산골마을 출신이라는 것을 창피하게 여겼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저는 아버지의 지성소를 침범한 죄인이었던 것입니다.


엄밀하게 따져보면 우리가 통속적으로 이해하는 바, 거룩하다는 것은 거짓되다는 것입니다. 대개 그 말은 종교적인 신과 숭배 행위 또는 그에 준하는 상황에 쓰이는데 그 종교나 상황의 경계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그렇지만 경계 밖에서 보면 전혀 까닭 없는 일입니다. 거룩하지 않은 것을 거룩한 것으로 꾸미고 그 거룩히 여김 속에서 정색하고 거룩해지려는 모습이 도리어 실소를 자아내는 경우가 거짓으로서 거룩함의 진경입니다.


본디 거룩한 것은 인간의 아우라가 아닙니다. 거룩한 것은 자연입니다. 거룩한 자연을 인간에게 은유 또는 환유한 것입니다. 자연의 장엄을 닮은 숭고가 인간에게서 나타날 때 거룩하다 할 수 있을 뿐입니다. 자연을 닮은 인간의 거룩함은 목적 없는 박애에 터하고 있습니다. 싯다르타·예수가 거룩한 것은 그 때문입니다. 통속 불교·기독교는 그렇지 않기 때문에 거룩하지 않습니다. 저들은 저들만의 목적이 있습니다. 저들은 거룩 떠는 떼거리입니다. 거룩 떠는 떼거리가 왜곡한 거룩 때문에 인간 영혼은 “무너진 집터”가 되어버렸습니다. 그 폐허에 저들은 “고액의 지폐 뭉치”를 숨겨두었습니다. 낮에는 거룩 떨고 밤에는 그 돈 생각하며 킬킬거립니다.


이제 이 거짓 세계에서 벗어나려면 우리는 “미래에서 온 신호”를 몸에 지닌 존재, 그러니까 노는 아이들이 되어야 합니다. 폐허 속으로 들어가 저들이 숨겨놓은 지폐를 꺼내와 “완전히 다른 용도로 사용”해야 합니다. “가지고 놀다가 찢어”버려야 합니다. “물신화된 돈을 일거에 세속적 장난감으로 변신”시켜야 합니다. 이것이 “세속화”입니다. “세속화는 자유의 실천이며, 우리를 초월성에서, 모든 형태의 예속화에서 해방”합니다. “그리하여 세속화는 내재성의 놀이 공간을 열어”줍니다.


이것이 끝이 아닙니다. 내재성의 놀이 공간에서 노는 아이들이 바로 싯다르타이며 예수라는 진실이 남아 있습니다. 거룩한 성인이 초월적 공간에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재적 공간에서 노는 평범한 필부필부가 거룩합니다. 위대한 성聖을 사소한 속俗이 품습니다. 사소한 속俗을 회복할 때 인간은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아니 스스로 구원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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