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리정치 - 신자유주의의 통치술
한병철 지음, 김태환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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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자유주의 체제와 함께 소진의 시대가 개막된다. 이제는 심리가 착취의 대상이 된다. 그리하여 새로운 시대는 우울증이나 소진증후군 같은 심리적 질병을 함께 가져온다.

  미국의 자기계발서에서 통용되는 마법의 주문은 힐링이다. 힐링이란 효율과 성과의 이름으로 모든 기능적 약점, 모든 정신적 억압을 치료를 통해 깨끗이 제거함으로써 자아의 최적화를 이룬다는 것을 의미한다. 시스템의 최적화와 완전히 부합하는 부단한 자아 최적화는 파괴적이다. 그것은 결국 정신의 붕괴로 끝나고 만다.·······(47-48쪽)

  ·······힐링은 킬링으로 귀결된다.(50쪽)


지상파 3사와 조·중·동 같은 황색저널리즘의 적폐는 가히 전방위적이거니와 그 가운데 말 더럽히는 짓을 빼놓을 수 없습니다. 최근 몇 년 동안 대표적으로 희생당한 말이 바로 멘토와 힐링입니다. 저들이 떠들기 전에 이 두 말은 매우 기품 있는, 함부로 입에 올릴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저들이 개나 소나 멘토라 부르고, 연예인 미셀러니에 값싼 눈물 섞은 설정을 힐링이라 부른 이래 두 말은 거의 막말 수준으로 타락하고 말았습니다.


말의 타락은 말의 타락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그 말 쓰는 사람들을 타락시킵니다. 타락한 사람들은 착각 상태에서 “시스템의 최적화와 완전히 부합하는 부단한 자아 최적화”로 빨려 들어갑니다. 한 번 빨려 들어가면 결코 나올 수 없는 자기계발의 늪에서 허우적거리다 한 생이 끝납니다. 이런 생은 “우울증이나 소진증후군 같은 심리적 질병” 그 자체입니다. 심리적 질병을 본질로 삼은 이제는 바야흐로 “소진의 시대”입니다.


소진증후군Burnout Syndrome은 심신의 피로가 누적되어 일상생활에서 의욕과 기력을 모두 잃어버리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의학적으로 정의된 용어가 아니고 사회학·경영학·사회복지학 분야에서 현대사회의 병리적 증후를 드러내는 용어로 정착시킨 것입니다. 의미 맥락을 따져보면 의학에서 말하는 우울장애를 사회과학적으로 표현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소진증후군과 본질이 같은 병리 현상으로 초신성증후군Supernova Syndrome이 있습니다. 정상을 향해 전력질주한 사람이 성공한 직후 갑작스럽게 깊은 우울상태로 빠져드는 소진 현상을 뜻합니다. (초신성은 별의 진화 최종단계에서 대폭발을 일으켜 엄청난 에너지를 순간적으로 방출하고 서서히 사라지는 현상을 말합니다.)


소진증후군이든 초신성증후군이든 우울장애든 각자의 영역에서 명명하는 일이 중요한 게 아닙니다. 의학은 사회정치적 패러다임을 구축해야 하고 사회과학이나 인문학은 의학적 패러다임을 구축해야 한다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기본적인 통찰은 이미 넘쳐나고 있지만 이론적 완성이나 실천의 측면에서는 아직 뚜렷한 움직임이 보이지 않습니다. 의학은 여전히 오만합니다. 사회과학이나 인문학은 구체적인 치료 도구를 가질 수 없는 한계에 막혀 결국 의학의 눈치를 보거나 긍정주의 따위에 기대는 자가당착을 범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미적거리는 사이 신자유주의의 “파괴”는 가차 없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그것은 결국 정신의 붕괴로 끝나고” 말 것입니다. 정신의 붕괴는 육체의 붕괴로 이어집니다. “힐링은 킬링으로 귀결”되는 것이 필연의 인과입니다. 소진의 시대는 곧 제노사이드의 시대입니다. 제노사이드는 힐링이란 매혹적인 독가스를 든 친절한 멘토가 자행하는 안락사입니다. 멘토의 안락사는 자살의 형태를 취합니다. 멘토의 힐링 멘트에 ‘좋아요’ 클릭으로 “디지털 아멘”(26쪽) 하는 바로 그 순간 우리는 스스로 죽는 것입니다.


신자유주의가 이끄는 소진의 시대, 제노사이드의 시대, 아니 자살유혹 시대를 뚫고 인간다운 삶을 단 하루라도 살기 위해 사. 소. 한. 제안 세 가지만 드리고 싶습니다. 지상파 3사와 조·중·동과 결별하시기 바랍니다. 지니고 계신 자기계발 서적을 모두 버리시기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멍 때리고 노는 것 빼고 모든 일을 딱 17초만 중지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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