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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안들
레나타 살레츨 지음, 박광호 옮김 / 후마니타스 / 2015년 5월
평점 :
·······한편으로는 사람들은 자신의 개성을 간절히 지키고 싶은 것처럼 보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책임을 맡아줄, 즉 선택의 가능성을 사실상 박탈해 가져가버릴 누군가를 찾고 있는 듯하다. 선택이 넘쳐나고 향락이 필수인 시대에 주체는 사실 자신의 주이상스를 규제해줄 주인을 찾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이런 주이상스 규제에 대한 요구는 주인이 사실 자신을 위한 주이상스를 훔쳐가고 있다는·······공포로 쉽게 변할 수 있다.·······
·······불안이 없는 사회도 사람들이 살아가기에 위험한 곳이리라.(270-272쪽)
종살이가 너무나 힘들고 지겨워진 한 노예가 주인에게 간청해 자유의 몸이 되었습니다. 기쁨에 겨워 길을 나선 노예는 얼마 못가서 두 갈래 길과 맞닥뜨렸습니다. 왼쪽 길로 가면 산적을 만날 위험이 도사리고 있었습니다. 오른쪽 길로 가면 천 길 낭떠러지 아래 바다로 떨어질 위험이 도사리고 있었습니다. 망설이고 망설이다 노예는 끝내 울면서 주인에게로 돌아갔습니다.
이 책의 저자가 말한 결정을 내리지 못하는 심리현상 “뷔리당티스”와 본질이 같은 이야기입니다.
[완벽히 똑같은 조건에서도 결정을 내리지 못할 수 있다는 이론을 제시한 프랑스 철학자 뷔리당의 이름에서 기원한다. ‘뷔리당의 당나귀’는 양쪽에 똑같은 먹이를 놓아두었을 때 당나귀가 어느 쪽을 먹을 것인가 결정하지 못하고 굶어죽는다는 이야기다.](111쪽 각주7)
본문에서 “주체”의 “개성” 그러니까 “선택의 가능성”과 “주인”의 “주이상스 규제”는 불안을 볼모로 잡고 거래하는 모순적인 힘입니다. 주체가 개성을 발휘할수록 그 자유가 동반하는 불안이 커집니다. 주인이 주이상스 규제를 강화할수록 안정이 동반하는 종속이 커집니다. 인간은 결국 이 두 힘의 쏠림 어디쯤에서 끊임없이 흔들리며 삶의 맥락을 구성하고 지평을 구획하는 운동 과정 그 자체입니다.
불안에 함몰된 것은 인간이 아닙니다. 불안과 절연된 것도 인간이 아닙니다. 100% 자유는 인간이 아닙니다. 100% 종속도 인간이 아닙니다. 인간이 인간인 것은 불완전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인간인 것은 불확실하기 때문입니다. 불완전과 불확실은 인간의, 생명의 숙명적 조건입니다. 이 조건을 있는 그대로 느끼고 알아차리고 받아들이는 것이 인간에 대한 지상의 예의입니다. 이 예의에 터하고서야 존엄이 성립합니다.
존엄은 모순을 타파하거나 극복하는 것으로 다다르는 경지가 아닙니다. 불안 없는 자유, 종속 없는 안정을 누리거나 그 둘 모두를 누리는 경지를 무어라 표현하든 그것은 이미 인간을 떠난 시공입니다. 여기에 다다랐다고 말하는 자는 그가 누구든 ‘깨달은 마귀’에 지나지 않습니다. 존엄한 인간은 인간의 불완전과 불확실을 인정하고 불안과 종속을 끌어안는 치열한 과정으로 존재합니다. 이 존엄의 과정은 홀로 갈 수 있는 길이 아닙니다. 홀로 성취한 것은 열반이든 행복이든 인간의 것이 아닙니다.

어제 문득 길상사를 찾았습니다. 항진자본주의 세상에서 ‘무소유’의 삶을 통해 맑은 울림을 주었던 법정이 길상화吉祥華 김영한의 무주상보시無住相布施의 뜻을 기려 한식집 대원각을 도량으로 조성한 곳입니다. 조용히 경내를 거닐다 홀연 돈점頓漸 논쟁의 다른 새김이 떠올랐습니다.
“돈오돈수頓悟頓修는 홀로 깨달았으니 홀로 실천한다는 말이고, 돈오점수頓悟漸修는 홀로 깨달았으되 이웃에 스며들어 실천한다는 말이다.”
이웃에 스며드는 데는 시간과 기다림이 필요합니다. 기다림에는 불안과 종속이 무한히 교차하고 뒤엉킵니다. 불안과 종속의 괴로움에 흔쾌히 함께 참여하는 것이 사랑입니다, 자비입니다. 개체로서 주체의 각성이 전체로서 공동체와 함께 갈 때만 참 각성입니다. 참 각성은 반드시 공존, 그러니까 자리이타自利利他의 실행으로 이어집니다. 자리이타의 큰 수레 속에서 불안은 이치대로 일어나 자라고 스러질 것입니다. 그 자체로 병 될 리 없습니다. 다른 병으로 확산될 리도 없습니다. 불안은 그저 불안입니다. 우리가 직면해야 할 것은 불안이 아닙니다. 불안을 그저 불안이 아닌 것으로 몰아가는 세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