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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안들
레나타 살레츨 지음, 박광호 옮김 / 후마니타스 / 2015년 5월
평점 :
오늘날 우리는 양육과 관련한 불안을 목격하고 있다. 이 불안은 자녀를 기르고 그들의 성장에 영향을 주는 최상의 방법에 대한 어떤 합의도 더는 없다는 사실에 기인한다. 부모들은 부모로서 잘하고 있지 못하다는 불안과 자녀에게 잘해주지 못했다는 죄책감을 느껴 왔고, 이는 무수한 저자들이 양육을 지도하는 책들을 쓰게 된 동기가 되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이런 조언들은 대개 서로 모순된 내용을 담고 있다.(179쪽)
고등학교를 자퇴하고 검정고시에 합격하여 대학 진학 준비를 하고 있는 열여덟 살 남자아이 하나가 저를 찾아왔습니다. 실은 중학생 때 저와 치유상담을 진행하다가 그 어머니가 일방적으로 중단시켰던 아이입니다. 그 때 찾아온 까닭은 어머니에게 있었습니다. 다시 찾아온 까닭 또한 어머니였습니다. 어머니에 대한 분노와 원망이 한층 더 격렬해진 아이는 때로는 가슴을 치며 때로는 온몸을 떨며 ‘어찌해야 할 줄을 모르겠다.’고 울부짖었습니다. 이 아이의 어머니는 다른 어머니들에게 자녀양육법을 가르치는 나름대로 유명한 강사입니다!
저는 그 아이의 어머니가 어떤 내용을 강의하는지 그다지 궁금하지 않습니다. 또 자신이 할 수 있는 그 이상을 남에게 가르치는 것에 대하여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고 싶지 않습니다. 인간인 한 근본적으로 흠을 지니지 않을 수 없으니 말입니다. 다만, 아이를 제대로 양육하고 있다는 근거 없는 자기 확신에 맞아 시퍼렇게 멍이든 자기 아이가 다른 상담자, 그것도 자기가 금지한 상담자를 2년 뒤에 다시 찾아왔다는 사실을 알 리 없는, 어머니를 가르치는 이 어머니의 비극에 대하여 삼가 극진한 마음으로 주의를 기울이고자 할 따름입니다.
저도 아비입니다. 우리가 범속한 부모로서 한 시대의 뒷자락, 이 사회의 변두리를 떠돌며 자녀 양육 문제를 놓고 왈가왈부하는 것은 정부正否·승패勝敗를 떠나 그 자체로 불운이며 불행입니다. 원하지 않은 삶의 조건에 휘말렸으니 불운입니다. 우리가 이리 된 것은 자녀 양육이 각자 해결할 문제로 변해버린 근대 이후를 살기 때문입니다. 어떤 선택을 해도 맑은 행복에 깃들 수 없으니 불행입니다. 우리가 이리 된 것은 자본주의 사회가 명령하는 매뉴얼을 따르면 그대로 인간파멸이고 중용을 따르면 극심한 불편을 견뎌야 하기 때문입니다.
더군다나 오늘 대한민국이라는 특수한 시공은 이 문제를 더욱 극단적으로 밀어붙이는 판이어서 불안 증폭의 기울기가 가파르기 그지없습니다. 장구한 세월 동안 약탈구조를 이끌어온 매판 지배집단이 자본주의와 신자유주의를 등에 업고 미증유의 살해와 착취를 자행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범속한 부모로서 우리는 대부분 대박을 꿈꾸며 자녀를 다그칩니다. 현실적으로 그러지 못하는 부모는 “자녀에게 잘해주지 못했다는 죄책감”으로 “부모로서 잘하고 있지 못하다는 불안”의 지속성이 강화되어 생사 차원의 스트레스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대중매체든 책이든 강의든 이루 다 헤아릴 수조차 없는 자녀 양육법이 횡행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그런 지도가 성공하는 예는 드뭅니다. 두 가지 원인 때문입니다. 하나는 자녀의 마음은 헤아리지 않고 ‘다 너 잘되라고 그러는 거야!’ 식 부모 편견에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자녀 양육의 문제가 공동체 전체의 문제가 아니고 내 자녀만의 문제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 함정에서 벗어나려면 남과 더불어 살아가는 세상에서 과연 내 자녀는 어떤 삶을 살면 행복해할까를 고민해야 합니다. 이것은 방법이 아닙니다. 자세입니다.
물론 이런 고민이 쉬울 리 없습니다. 이런 고민을 한다는 것 자체가 이미 쪽박의 증거가 되는 대한민국이니까 말입니다. 어려운 상황에서 우리가 판단의 지표로 삼아야 할 것은 그래도 우리는 새끼들이 살아 있으니 이런 고민의 고민에라도 빠질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생때같은 새끼 바다에 빠뜨려 죽이는 걸 목도하고서도 왜 죽였는지 알 수조차 없는 부모들 앞에서 이것은 호강에 겨워 요강에 똥 싸고 자빠진 고민 아니던가요. 죽음의 하루하루가 쌓여 470일이 된 어느 날 욕먹고 뺨 맞은 부모 앞에서 차마 변명 못할 고민 아니던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