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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안들
레나타 살레츨 지음, 박광호 옮김 / 후마니타스 / 2015년 5월
평점 :
불안은 욕망과 주이상스의 정중앙에 있다.·······불안은·······주이상스와의 고통스러운 마주침을 경고하는 정서·······다.·······성공을 더없이 행복하고 조화로운 상태가 아니라 주이상스와 가까운 것으로 여긴다면 불안은 욕망을 계속 살아 있게 하는, 주이상스에 대한 보호막으로 인식할 수 있다.(108-110쪽)
“노예가 노예로 사는 삶에 너무 익숙해지면 놀랍게도 자신의 다리를 묶고 있는 쇠사슬을 서로 자랑하기 시작한다. 어느 쪽의 쇠사슬이 빛나는가, 더 무거운가.”
리로이 존스(아미리 바라카)가 NY 할렘에서 행한 연설문 일부입니다.
쇠사슬 자랑하는 노예는 세상 도처에 있습니다. 벌거벗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성공을 거둔 사람들은 “더없이 행복하고 조화로운 상태가 아니라” 빛나고 무거운 쇠사슬을 자랑하는 노예 상태에 있는 것입니다. 세계적으로 7억 명 이상이 마음병을 앓고 있는데 그 중 많은 사람들이 “고통체”로서 자신의 아픔을 즐기는 상태에 놓여 있습니다.
주이상스는 불편함을 회피하기 위한 중독 정서입니다. 미리암 그린스팬이 말하듯 그런 유의 “즐겁게 느끼기”는 가장 근본적인 중독입니다. 죽음을 향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죽음 충동인 “주이상스에 대한 보호막”으로서 불안이라면 이 불편한 정서야말로 우리 삶의 관건적 일부임에 틀림없습니다.
한약이나 침으로 병을 치료할 때 증상 심화 과정을 거치는 경우가 원칙입니다. 병에 굴복했던 몸이 한약이나 침의 알림과 도움으로 자연치유력을 회복하는 기전에서 나오는 불편함입니다. 통증·발열이 대표적인 예입니다. 불안과 본질에서 닿아 있습니다. 통증·발열이든 불안이든 불편하지만 생명 편에 서 있습니다. 여기다 대고 무조건 항불안제, 진통제를 투입하는 서구의학은 죽음 편에 서 있습니다. 주이상스 의학입니다. 의학이 아닙니다.
칼 구스타프 융의 다음 말에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습니다.
“빛의 모습을 상상하는 것으로는 깨달을 수 없다. 그러나 어둠을 의식적으로 만들어내는 것으로는 가능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