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안들
레나타 살레츨 지음, 박광호 옮김 / 후마니타스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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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기술의 진보를 근거로 오늘날의 세계가 이전 세계와는 근본적으로 다르다고 인식하는 것은 궁극의 환상일 것이다. 이 환상은 무엇보다, 주체(즉 개인)는 여전히 전적으로 결여를 특징으로 하며 사회적인 것(즉 사회)은 여전히 적대가 특징이라는 사실을 은폐한다. 비록 사람들이 결여의 자리에서 출현하는 심란한 대상들을 예측하고, 예방하며, 아니면 적어도 충분히 묘사할 수 있다는 인상을 받을지도 모르지만 그렇다고 해서 실제로 불안이 줄어드는 것은 아니다.(102-103쪽)

 

기술은 편의의 문제입니다. 편의는 부가적 의미를 지닙니다. 부가적 의미로 근본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습니다. 근본 문제를 해결할 수 없는 편의를 고도화할수록 근본 문제가 은폐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합니다. 인간에게 무엇이 근본 문제입니까? 다름 아닌 불안입니다. 불안이 왜 근본문제입니까? 인간 생명은 영원불변의 실체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영원불변의 실체를 꿈꾸고 불안을 완전히 없애면 나타나는 결과는 무엇일까요? 죽음입니다. 불안을 없애려는 노력은 결국 모순에 가 닿습니다. 모순에 가 닿은 인간이 불안의 두 얼굴을 있는 그대로 느끼고 알아차리고 받아들일 때에만 근본문제는 해결됩니다. 근본문제의 해결은 역설을 타고 노는 것입니다. 역설을 타고 노는 것이 원효의 무애이며 붓다의 열반이며 예수의 자유입니다. 인간의 무애·열반·자유를 손해로 계산하는 세력이 있습니다. 사회를 지배하는 극소수 무리입니다. 그들은 “적대”가 특징인 사회를 통해 수탈하지 않으면 견딜 수 없는 무리입니다. 수탈을 극대화하기 위해 사회의 “적대”를 은폐합니다. 사회의 “적대”를 은폐하기 위해 개인의 “결여”를 은폐합니다. 개인의 “결여”를 은폐하기 위해 기술 진보를 통해 유토피아를 건설할 수 있다고 “궁극의 환상”을 불어넣습니다. “궁극의 환상”에 중독되어 “그렇다고 해서 실제로 불안이 줄어드는 것은 아니”라는 진실을 모른 채 개인은 간도 쓸개도 다 빼줍니다. 이것이 오늘을 사는 인간의 비극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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