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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명사회
한병철 지음, 김태환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4년 3월
평점 :
신뢰 위에 세워진 사회에서는 투명성에 대한 집요한 요구가 생겨나지 않는다. 투명사회는 불신과 의심의 사회, 신뢰가 줄어들기에 통제에 기대려는 사회다. 투명성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아진 것은 사회의 도덕적 기반이 취약해졌다는 것, 진실성이나 정직성과 같은 도덕적 가치가 점점 더 의미를 잃어가고 있다는 것을 증명한다.(98쪽)
지난 일요일 아내의 스마트폰 벨 소리가 새벽 정적을 뒤흔드는 순간 우리 부부는 직감했습니다. 뇌수술 후 지난 11년 동안 병상에 누워 존엄이 무너지고 고통만 가득한 삶을 살아오셨던 장모님께서 드디어 영면에 드신 것 말입니다. 어느 정도 예고된 일이었으므로 우리는 비교적 침착하고 능숙하게 장례를 치러냈습니다.
슬픔의 의식이 진행되는 동안 웃음소리가 그친 적은 많지 않았습니다. 문상을 온 수많은 사람들은 죽은 사람보다 산 사람들을 이야기하였습니다. 조의금으로 푼돈을 낸 사람도 거액을 낸 사람도 한 자리에 앉아 소주잔을 기울였습니다. 고인과 나눈 서사가 있었던 사람들은 소리 내어 울며 비탄의 말을 쏟아내기도 했지만 육개장 놓인 밥상 앞에 앉으면 마음 풍경은 금세 일상의 장면으로 돌아오기 마련이었습니다.
왁자한 전체 분위기는 부분적인 에피소드들의 깊이와 높이를 눙치면서 매끈하게 흘러갔습니다. 어머니를 잃은 딸의 슬픔과 상조회에서 파견한 용역직원 아주머니의 짜증이 동급이 되는 데에 걸린 시간은 극히 짧았습니다. 다양하게 얽힌 사회조직의 기계적 이해관계가 맞물리면서 별다른 일 없이 순식간에 장례식은 투명해졌습니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있을 법하지 않은 사회의식이 그 2박3일 여정을 해남 어느 고즈넉한 마을 뒷산에서 끝냈습니다. 바다에서 불어온 바람 한 줄기가 등성이 소나무를 지나 무덤을 평평하게 쓸고 지나갑니다. 이 평평함에 실어 남은 사람들은 고인과의 인연을 개켜 넣고 각자 남을 삶을 살아갈 것입니다.
장례 때문에 중단했던 진료를 다시 시작하면서 틈틈이 생각에 잡깁니다. 삶의 마지막에 죽음이 있다고 생각하므로 죽음은 끝내 불투명한 심연이고 그에 대한 공포를 피하기 위해 몸부림치며 살아가므로 인간은 끝내 스스로의 삶까지 불투명하게 만드는 것 아닐까·······. 거꾸로 죽음에서 시작하여 삶을 생각한다면 투명해지지 않을까·······.
사실 여태까지 『투명사회』를 읽으면서 우리는 그 투명의 뜻을 부정적인 여러 각도에서 음미하였습니다. “도덕적 기반이 취약”해진, “진실성이나 정직성과 같은 도덕적 가치가 점점 더 의미를 잃어가고” 있는, “불신과 의심의 사회”에서 구성원이 요구하는 절박한 투명이 아니라 권력과 재벌, 그리고 통속종교의 지배집단이 요구하는 적반하장의 투명이었기 때문입니다. 적반하장의 투명에 스톡홀름증후군에 빠진 국민이 부역하는 투명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런 투명이라면 불투명한 세계의 진실에 터하여 무너뜨려야 할 대상임에 틀림없습니다.
여기서 정색하고 다시 한 번 생각해보겠습니다. 인간의 삶이란 무릇 불투명한 세계의 진실을 드러내는 투명을 벼리는 과정이 아니던가요. 세계 진실은 불투명하다고 인정하는 것 자체가 이미 투명의 어법이 아니던가요. 바로 이 역설을 깨닫는 것이 인간의 인간다움이자 도리입니다. 불투명과 투명의 경계에서 부단히 만들어지는 사건 자체가 인간을 형성합니다. 결국 중요한 것은 불투명 여부 자체가 아닙니다. 투명의 독재가 편만할 때는 혁명합니다. 불투명의 참주가 날뛰면 방벌放伐합니다. 그것이 인간입니다.
지난 50년 동안 모녀의 인연을 맺으며 살아온 어머니를 잃은 아내 마음을 제가 모조리 투명하게 들여다 볼 수 없습니다. 지난 50년 동안 모자의 인연이 끊어진 채 살아온 제 마음이 아내 마음을 전혀 모른다고 할 수 없습니다. 다 안다고 설칠 수 없고 모른다고 내버려둘 수도 없는 경계의 마음으로 오늘 하루 저는 아내를 가만히 지켜보며 머무릅니다. 부부 사이의 도덕적 기반 도덕적 가치를 생각합니다. 진실과 정직을 생각합니다. 신뢰와 투명을 생각합니다. 불투명성의 투명성과 투명성의 권력관계가 스며든 틈을 살펴봅니다. 죽음에 기대어 우리는 또 남은 날들을 살아가야 하기 때문입니다.<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