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명사회
한병철 지음, 김태환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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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명사회는 정보사회다. 정보는 어떤 부정성도 알지 못한다·······. 정보는 긍정화되고 조작 가능하게 만들어진 언어다.·······정보의 무더기가 진리를 낳는 것은 아니다. 더 많은 정보가 방출될수록 세계를 전체적으로 파악하는 것은 더욱 어려워진다.(83-86쪽)

 

늦깎이 의자醫者로서 오십 넘어 처음 한의원 열던 때의 일입니다. 경험 있는 젊은 선배들의 도움을 여러 면에서 받았습니다. 가장 어려웠던 것이 인테리어 공사 문제였습니다. 가능하면 많이 접촉해보고 결정하라는 말들을 듣고 8개 업체한테서 도면을 받았습니다. 선택지가 많으면 좋겠거니 싶은 막연한 생각 때문이었는데 정작 그 것들을 펼쳐 놓으니 도무지 판단을 내릴 수 없었습니다.

 

이 경험은 삶 전반에 걸쳐 정보와 판단 문제를 생각해보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선택지가 3 개를 넘어서면 판단력에 비상이 걸립니다. 6개를 넘어서면 마비 지경이 됩니다. 객관식 시험 문제의 선택지가 4-5개인 것은 이런 심리 추이를 고려한 지혜의 소산일지도 모릅니다. 아무튼 그 때 저는 인테리어 회사 대표의 사람됨을 보고 최종 판단을 내렸습니다. 잘한 일이었습니다.

 

긍정화되고 조작 가능하게 만들어진” 정보가 많아질수록 부정성의 사유 능력은 사위어가기 마련입니다. 부정성의 사유가 작동하고서야 잉태할 수 있는 진리를 “정보의 무더기”가 “낳는 것은” 남자 혼자 아이를 낳는 것처럼 불가능합니다. 투명하게 조작된 “더 많은 정보가 방출될수록” 불투명한 “세계를 전체적으로 파악하는 것은 더욱 어려워”질 수밖에 없습니다.

 

세계가 불투명한 것은 세계가 무한 스펙트럼의 비대칭적 대칭으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비대칭적 대칭은 완전히 포개지지 않기 때문에 무한 스펙트럼의 불투명한 ‘지성소至聖所’를 간직하고 있습니다. 불투명한 ‘지성소’는 정보적 접근이 원천적으로 차단된 금단의 땅입니다. 이 금단의 땅이 ‘불온하고 발칙한’ 변화의 본진이기 때문에 투명사회는 한사코 여기를 궤멸시키려 합니다. 여기가 궤멸되면 투명사회, 아니 세계 자체도 궤멸된다는 사실을 모르고 하는 짓입니다.

 

대한민국의 ‘지성소’는 어디일까요? “긍정화되고 조작 가능하게 만들어진” 정보적 인간들은 아무 생각 없이 대뜸 “청와대”라고 답할 것입니다. 청와대는 ‘불온하고 발칙한’ 변화의 본진이 아니기 때문에 결코 ‘지성소’가 될 수 없습니다. 청와대는 ‘지성소’를 한사코 궤멸시키려 하는 투명사회의 컨트롤타워입니다. 이 컨트롤타워가 진실로 컨트롤하지 않는 것이 ‘지성소’입니다.

 

매판·독재·통속종교 지배집단이 “긍정화되고 조작 가능하게 만들어진” 거짓 정보로 ‘전시’해버린 세월호의 진실, 메르스의 진실이야말로 대한민국의 ‘지성소’입니다. 저들이 쌓아 놓고 던져준 “정보의 무더기”로 투명해진 “진실”은 결코 진실이 아닙니다. 부정성의 복원을 통해 확보한 증거와 논리가 저들이 붕괴시킨 서사를 다시 구축할 때 비로소 참된 진실이 세워질 것입니다. 이 진실 속에 끝내 꿰뚫을 수 없는, 차마 꿰뚫어서는 안 될 불투명한 숭고와 존엄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더는 “긍정화되고 조작 가능하게 만들어진 언어”에 속지 말아야 합니다. 긍정화에 세뇌되어 무슨 말을 들어도 무슨 짓을 보아도 그저 고개를 끄덕거리기만 하는 이 참혹한 상황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판단력을 마비시키는 저 매판·독재·통속종교 지배집단의 무더기 정보에 질문과 저항의 칼을 들이밀어야 합니다. 아무 짓도 않으면서 모든 것을 지휘하는 것처럼 꾸미는 통치의 거짓 “진실”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기어이 사는가 싶게 한 번 살아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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