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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명사회
한병철 지음, 김태환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4년 3월
평점 :
친밀성은 심리학적으로 표현된 투명성의 공식이다.·······친밀성의 독재는 모든 것을 심리화하고 개인화한다.·······친밀사회는 개인으로 하여금 스스로에게서 벗어나 자신을 잃어버리게 만드는 제의적, 의식적 상징들을 제거한다.······나르시시즘적 주체는 자기 자신의 경계를 한정하지 못한다.·······자기 자신과 너무나 밀착되고 융합되어버려·······자기 자신에 대한 무한한 친밀성 속에서 익사한다.(73-77쪽)
예일대학교 한 연구팀의 연구 결과에 따르면 인터넷을 통해 정보를 얻고 활용하는 사람들이 다른 방식, 예컨대 책으로 그런 행위를 하는 사람보다 더 똑똑하며 우월하다고 스스로 생각한다고 합니다. 그 생각이 착각에 지나지 않는다는 평가가 연구 내용에 포함되어 있음은 물론입니다.
“모든 것을 심리화하고 개인화”하는 “친밀성의 독재”가 낳은 “나르시시즘적 주체”가 빠져버린 오류의 심연입니다. “자기 자신과 너무나 밀착되고 융합되어버려·······자기 자신에 대한 무한한 친밀성 속에서 익사”하는 풍경입니다. 모름지기 돌이키기 어려운 상황이 아닌가 합니다.
스마트폰 하나로 세상의 모든 것과 접속하는 젊은 세대에게 만연해가는 현상이 일종의 경계선장애입니다. “자기 자신의 경계를 한정하지 못”하는 병리현상인데 저는 서구 정신의학과 달리 특정 질환의 이름으로 사용하지 않습니다. 나한테서 남을 쪼개내는 극단적 자기애와 남한테 나를 포개버리는 극단적 자기소외의 비대칭적 대칭의 축을 가리킵니다. 굳이 그런 식으로 말하자면 ‘분열형’ 마음병인 전자와 ‘우울형’ 마음병인 후자를 아우르는 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얼핏 보면 “자기 자신에 대한 무한한 친밀성”은 극단적 자기애하고만 연결될 것 같지만 본질이 자기 신뢰의 상실이기 때문에 그것을 공통 기반으로 하는 극단적 자기소외와도 연결됩니다. 양자가 한 사람의 내면에 공존하기도 합니다.
자기 신뢰의 상실은 사회가 강요하는 투명성 때문입니다. 신뢰는 근본적으로 불투명성을 전제하므로 “자기 자신과 너무나 밀착되고 융합되어”버리는 “무한한 친밀성”으로 드러나는 투명성은 자기 신뢰를 원천적으로 제거합니다. 남는 것은 비현실적이고 무근거한 나르시시즘입니다.
투명성이 깊어질수록 이 나르시시즘 냄새는 더욱 짙어지기 마련입니다. 적정한 거리를 확보함으로써 “자기 자신의 경계를 한정”하고 타인과 소통하여 공감·공유하는 삶을 살지 못하기 때문에 “나르시시즘적 주체”의 체취는 고독하고 유독합니다.
고독은 자기를 죽입니다. 우울증입니다. 유독은 타인을 죽입니다. 사이코패스입니다. 국가적 차원에서 말하면 유독한 사이코패스 환자는 수탈을 자행하는 지배층입니다. 고독한 우울증 환자는 수탈당하는 피지배층입니다. 지금 대한민국은 이 전형을 너무도 “투명”(!)하게 보여줍니다. 무엇보다도, 국민을 끊임없이 죽이면서 유체이탈 어법으로 자기신화만 쓰고 있는 전대미문의 사이코패스 집단, 그 무한한 자기친밀성. 종말을 이야기하기 위해 본문을 다시 인용하는 일은 차마 하지 못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