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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명사회
한병철 지음, 김태환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4년 3월
평점 :
오늘날 시간의 위기는·······분산과 해체에 있다. 시간적 질서가 어지럽혀지면서 시간은 방향을 잃고 이리저리 마구 날아다닌다. 시간은 붕괴되어 점점이 원자화된 현재들의 연속으로 전락한다. 시간은 가산적으로 되고, 서사성을 완전히 상실하고 만다. 원자는 향기가 없다.(70쪽)
시간의 질서란 과거-현재-미래로 이어지는 인과적 흐름을 말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흐르는 시간은 없기 때문입니다. 시간은 공간, 그러니까 세계에 들어찬 무수한 사건의 서로 다른 경과가 지닌 무량한 결입니다. 시간의 “분산과 해체”, 그러니까 “붕괴”는 이 서로 다른 경과가 지닌 결을 혼효混淆하는 것입니다. 혼효의 결과가 다름 아닌 “서사·······상실”입니다. 이야기를 잃어버리고 “원자화”된 시간에 그 무슨 “향기”가 있을 것입니까. 향기가 사라진 시간에 그 무슨 아름다움이 있을 것입니까.
아름다움은 우주의 일차적 본질입니다. 의당 인간의 일차적 본질입니다. 이 일차적 인간 본질을 지키고 가꾸어 나아가는 노력 가운데 가장 강력한 것이 바로 국가입니다. 서로 다른 결 사이에 일어날 수 있는 충돌, 아니 그보다 먼저 결 사이에 일어나는 일방적 폭력을 공인된 힘과 돈으로 방지하는 것이 국가의 임무입니다. 우리는 인간 역사를 통해 독성을 지닌 아름다움으로 다른 아름다움을 수탈하고 멸절시키는, 그리하여 자신의 아름다움마저 잃어버리는 경우를 수도 없이 경험한 바 있습니다.
국가가 이 임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거나 게을리 한다면 더는 존재할 이유가 없습니다. 심지어 대놓고 저버린다면 당연히 폐기해야 합니다. 지금 여기 대한민국에서 임무를 대놓고 저버리는 국가를 목도하고 있습니다. 2014년 4월 16일 인간의 아름다움을 온갖 협잡으로 잔혹하게 살해하였던 바로 그 국가가 2015년 6월 8일 오늘 현재 또 다시 인간의 아름다움을 온갖 협잡으로 잔혹하게 살해하고 있습니다. 이 국가가 쓰고 있는 병기가 다름 아닌 시간의 분산과 해체입니다. 서사의 착취입니다.
가장 핵심적인 착취 전략은 “사건의 경과”를 뒤죽박죽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사건의 경과”를 뒤죽박죽으로 만드는 핵심 전술은 ‘닥치고’ 하는 거짓말입니다. 거짓말 중 가장 큰 파괴력을 지닌 것이 바로 ‘대통령의 시간’입니다. ‘대통령의 시간’은 전혀 하자 없는 촘촘한 서사를 구성하는 것으로 발표·보도되는 바로 다음 찰나 치명적 부재를 공공연히 드러냅니다. “사건의 경과” 진실과 전혀 관련 없는 설정 임재臨在가 시간을 분산하고 해체합니다. 세월호 시간도 메르스 시간도 산산이 흩어집니다.
사건의 서사적 시간은 그 “질서가 어지럽혀지면서·······방향을 잃고 이리저리 마구 날아”다닙니다. 죽음은 확산되고 불안은 증폭됩니다. 세월호 우울로 위축된 경기는 메르스 공포 때문에 바닥을 칩니다. 비인간적 소수의 향락과 다수의 인간적 고통의 격차는 커집니다. 국민의 시간을 붕괴시킬수록 형형해지는 ‘대통령의 시간’, 그 무향無香의 원자들은 과연 무엇을 위해 저리도 철통 같이 보위되는 것인지요. 이 나라 국민으로 태어나 사는 최소한의 의미가 궁금합니다. 붙들고 물어볼 사람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