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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명사회
한병철 지음, 김태환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4년 3월
평점 :
정의되지 않는 것을 더 이상 허용하지 않는 투명한 커뮤니케이션은 외설적이다.(69쪽)
정의定義를 내리는 것은 사유나 실천 대상을 명백히 하기 위한 편의 행위입니다. 불가피하다기보다는 필요악에 가까운 것입니다. 왜냐하면 명백히 한다는 것은 거기에 국한한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국한한다는 것은 지배 욕구에 가 닿습니다. 정의의 속성은 언어 그 자체의 속성과 같이 근본적으로 정치적입니다. 정치는 자기의 불투명성을 보위하기 위해 상대에게 투명성을 강제하는 욕망입니다. 욕망이 불안과 무지와 동맹하여 피지배 사회전체를 투명한 외설로 만듭니다. 투명한 외설로서 커뮤니케이션은 소통의 이름으로 가하는 소통의 모독입니다. 소통의 모독에 이르러 정의定義는 내파implosion당하고 맙니다.
한의학에는 『상한론傷寒論』이라는 의서가 있습니다. 『황제내경黃帝內徑』의 대척점에 서 있는 텍스트로서 야전野戰의 혈향血香이 도처에 배어 있는 임상 논픽션입니다. 여기에는 여섯 개의 병에 대한 제강提綱 또는 제요提要가 있습니다. 그 중 선두에 선 것이 바로 다음 문장입니다.
大陽之爲病 脈浮 頭項强痛而惡寒.
대양지위병 맥부 두항강통이오한.
쉽게 풀어 쓰겠습니다.
맥이 뜨고, 머리가 아프고, 뒷목이 뻣뻣하면서 으슬으슬 춥다면 맨 처음 열(양)로 나타나는 병이 (구성)된다.
제강提綱 또는 제요提要라는 기대에 어긋나는 내용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를테면 기축으로서 병에 대한 정의나 이론적 개념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 『황제내경黃帝內徑』의 사진四診, 곧 망문문절望聞問切의 순서 내지 중요성을 절문문망으로 전복시킨 것이 충격적입니다. 아니, 『황제내경黃帝內徑』이 가장 중시하는 망진望診, 그러니까 병을 진단할 때 의자醫者가 눈으로 보아서 알 수 있는 내용이 탈락되어 있습니다. 환자의 몸에 직접 손을 대고서야, 질문하고서야 알 수 있는 내용만으로 짜여 있습니다. 이것은 진단이 의자가 소유한 능력을 일방적으로 구사하는 단독행위가 아니라 환자와 소통함으로써 함께 구성해가는 쌍방행위라는 선언입니다. 이것은 병이 불투명하다는, 연역이 불가능하다는 저항의 담론이며 의학혁명의 격檄입니다.
『상한론傷寒論』은 “정의되지 않는 것을 더 이상 허용하지 않는 투명한 커뮤니케이션”을 거부합니다. “외설” 의학의 텍스트, 『황제내경黃帝內徑』을 거절합니다. 병의 서사구조를 복원하고자 분투한, 심지어 실패한 사실에 대하여 신랄하게 보고합니다. 위기에 처한 인간을 구하기 위해 필요한 참된 인문人文 정신이 무엇인지 직접 그 몸을, 그 냄새를, 그 정서를, 결결이, 울퉁불퉁하게 드러내어 제시하고 있습니다.
『상한론傷寒論』은 정의하지 않습니다. 실재, 적어도 현실, 최소한 증상을 있는 그대로 묘사합니다. 생의 과정에서 일어나는 고통을 그 어떤 인문학보다 정확하고 예술적으로 표현합니다. 극화도 수사修辭도 없이 단소정한短小精悍(사기史記 중 유협열전遊俠列傳에 나오는 말로 짧고 작은 것이 정밀하고 세차다는 뜻임) 그 자체로 역동적 인문입니다.
오늘 여기 대한민국에 『상한론傷寒論』의 인문정신이 절실히 요구됩니다. 문학은 문학대로 철학은 철학대로 과잉되어 뜨르르한 스타들을 배출하고 있지만 정작 세상은 반인문적으로 고착되고 있으니 말입니다. 문학하는 사람이 문학을 넘어, 철학하는 사람이 철학을 넘어, 『상한론傷寒論』적 논픽션으로 무장하고 단소정한의 인문전쟁을 벌여야 할 때가 왔습니다. 세월호사건 이후 달라진 전선을 직시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