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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명사회
한병철 지음, 김태환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4년 3월
평점 :
순례여행은 흔히 마지막 단계에서 행렬로 마무리된다. 엄격한 의미의 종결은 오직 하나의 이야기 안에서만 가능하다. 탈서사화된 세계, 탈제의화된 세계에서 끝은 오직 고통스럽고 당혹스러운 중단일 뿐이다. 오직 이야기의 틀 속에서만 끝은 완성으로 나타날erscheinen 수 있다. 어떤 서사적 가상Scheinen도 없는 경우에 끝은 언제나 절대적인 상실, 절대적인 결핍일 수밖에 없다.(67쪽)
투명사회에서는 의학도 투명의학이 됩니다. 약도 투명 약이 됩니다. 당연히 병도 투명 병이 됩니다. 결국 사람의 몸도 투명한 몸이 됩니다. 심지어 마음까지 투명한 마음이 됩니다. 설마 의학까지 그러랴 하실지 모르지만 의학만큼 한 나라의 정치경제 구조와 그 문화의 직접적인 영향을 받는 분야도 드뭅니다. 서구의학의 기본 패러다임이 본디 그러하거니와 특히 미국식 현대의학, 뇌 과학, 초국적 제약 산업과 의료기기 산업은 투명성 강제에서 초월적 권위를 누리고 있습니다. 지구상에서 가장 미국화한 나라인 대한민국이 그 직접적인 영향 아래 놓이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한의학이라는 이름을 지닌 동아시아 의학 패러다임으로 수천 년 동안 조선 문명과 생태공동체를 유지해온 우리의 유구한 보건의료 전통이 서구의학에 완전히 점령당하는 데는 불과 백 여 년이란 시간밖에 걸리지 않았습니다. 발목 접질렸을 경우 말고는 병났을 때 한의원부터 찾는 사람은 이제 거의 없습니다. 돌고 돌다 안 되면 한의원 오는 사람이 대부분입니다. 그렇게 찾아온 사람들이 하는 한결같은 말은 서구의학 치료 효과가 “그때 뿐”이라는 것입니다. 이 말은 서구의학의 치료 효과가 “고통스럽고 당혹스러운 중단일 뿐”인 본질을 지니고 있다는 경험의 토로입니다. 왜 그럴까요?
서구의학은 근본적으로 인간의 병을 기계의 고장과 동일하게 봅니다. 고장 난 기계는 고장 난 부분을 수리하면 그뿐입니다. 기계와 그 고장은 서사성이 없습니다. 기승전결이 없습니다. 서사에 따르는 이미지와 장면이 없습니다. 같은 기계 같은 고장에는 같은 수리가 있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고장 난 기계 수리하듯 하는 서구의학은 병의 서사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사람의 차이를 고려하지 않습니다. 병명이 같으면 같은 약 처방을 내립니다. 그 약은 수리용 약입니다. 수리용 약은 본질이 증상 억제입니다. 증상 억제의 본질은 진통입니다. 진통의 본질은 ‘약발’이 떨어지면 고통이 제자리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제자리로 돌아간 고통은 더욱 당혹스럽게 합니다. 당혹스러움을 피하여 장기복용 상태로 들어갑니다. 장복된 약물은 복용이 중단될 때 금단 증상을 동반합니다. 금단증상을 피하여 평생 복용 상태로 들어갑니다. 결국 그 약은 치료를 통해 병을 “종결”시키는 것이 아니라 “절대적인 상실, 절대적인 결핍” 상태에서 영원한 “중단”을 맞게 합니다. 이것이 서구의학의 투명성입니다.
인간은 기계 너머의 존재입니다. 인간의 병 또한 고장 너머의 존재입니다. 서사가 있습니다. 기승전결이 있습니다. 태어나 자라고 쇠하다 스러집니다. 같은 이름의 병이라도 사람마다 다릅니다. 다른 풍경 다른 냄새가 있습니다. 궁극적으로 투명한 것은 없습니다. 한의학은 이 불투명성을 그대로 받아들입니다. 침도 한약도 그 불투명성의 서사 속으로 발맘발맘 걸어 들어갑니다. 투명성 신화를 맹종하는 자들이 한의학을 의학으로 인정하지 않는 소이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러나 이들의 무지한 멸시를 넘어 한의학은 병의 서사를 “마무리” 짓고 “완성으로 나타날erscheinen 수 있”게 합니다.
지금 우리가 사회정치적 중병을 앓고 있다는 사실을 누구도 모르지 않습니다. 그 치료가 서구, 특히 미국의 패러다임을 따르고 있다는 사실에 대하여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리 가면 우리사회는 결국 “절대적인 상실, 절대적인 결핍” 상태에서 영원한 “중단”을 맞게 될 것이 분명합니다. 죽음에 이르는 병을 앓는 국민에게 진통제 몇 알로 치료를 끝내겠다는 자들이 오늘도 권력을 조자룡 헌 칼 쓰듯 휘두르고 있습니다. 아프십니까. 낫고 싶습니까. 이 순례를 “종결” 짓고 “완성으로 나타날erscheinen 수 있”게 하고 싶습니까. 일어나 제의를 복원하십시오. 입을 열어 서사를 복구하십시오. 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