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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명사회
한병철 지음, 김태환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4년 3월
평점 :
제의와 의식에는 고유한 시간, 고유한 리듬, 고유한 박자가 있다. 투명사회는 모든 제의와 의식을 철폐한다. 제의와 의식은 조작을 허용하지 않고, 정보와 커뮤니케이션과 생산의 순환 과정을 가속화하는 데 방해물이 되기 때문이다.(64-65쪽)
마음병 때문에 심리상담 할 경우 서구의학이나 심리학을 한 사람들은 보통 한 회기session를 45-50분으로 잡습니다. 이것은 마치 아프리카 국경선 같은 인위적 시간 구획입니다. 저는 80-90분 사이, 결국은 90분을 기준으로 삼습니다. 오랜 경험 끝에 상담을 청한 분들과 함께 얻은 깨달음입니다.
80분 이내로 잡으면 상담을 청한 분이 하고 싶은 말을 다 못한 채 맥이 끊긴 상태에서 중단하게 됩니다. 90분이 넘어가면 상담을 청한 분의 집중력이 떨어지고 지치게 됩니다. 80-90분 사이가 중용적 어름입니다. 개인차가 있음은 물론입니다. 무려 300분 넘는 상담도 여러 번 있었습니다.
저의 이런 경험적 시간 구획은 미리 알고 일부러 맞춘 것이 아님에도 인간의 어떤 생명주기에 대한 체득임이 분명해 보입니다. 왜냐하면 90분은 수면의 한 주기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대화(상담) 주기와 침묵(수면) 주기의 일치는 하등 특별할 것이 없습니다. 귀 기울이면 “고유한 시간, 고유한 리듬, 고유한 박자”를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
투명사회는 인간의 공통적인 생명주기는 물론 개인마다 지니는 고유한 생명주기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지 않습니다. “정보와 커뮤니케이션과 생산의 순환 과정을 가속화하는” 어젠다에 맞추어 표준화합니다. 사이보그는커녕 로봇만도 못한 인간이 99.9%가 되는 그날까지 투명성은 집요하게 강제될 것입니다.
어제 한 청년이 찾아왔습니다. 외모에 대한 강박적 집착 때문에 일상이 속절없이 무너져 내리고 있었습니다. 또래 친구들과 비교하면서 뒤쳐진 인생을 수습할 길을 찾지 못한 채 불안과 우울의 늪으로 감겨들고 있었습니다. 상담을 끝내고 돌아서는 그 청년에게 간곡히 당부했습니다.
“당신의 삶을 제의로 여기며 사십시오. 그러면 반드시 자신에게 ‘고유한 시간, 고유한 리듬, 고유한 박자가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