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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명사회
한병철 지음, 김태환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4년 3월
평점 :
·······에로틱한 것과 포르노적인 것 사이의 본질적인 차이·······벌거벗은 것의 직접적 전시는 에로틱하지 않다. 몸에서 에로틱한 부분은 바로 “옷의 벌어진 자리” “두 개의 가장자리 사이”, 이를테면 장갑과 소매 사이에서 “빛나는” “피부”다. 에로틱한 긴장은 벌거벗은 몸을 지속적으로 전시할 때가 아니라 “빛의 점멸을 연출”할 때 생겨난다. 벌거벗은 몸에 광채를 더하는 것은 “중단”의 부정성이다.(55쪽)
오래 전 강원도 어느 농가에 잠시 머물렀던 적이 있습니다. 하루는 이웃 어르신이 크게 역정 내시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연유를 들으니 한전이 콩밭 근처에 가로등을 설치하는 바람에 농사를 망쳐서 가로등을 철거하라 요구했으나 안 된다고 하기에 화가 났다는 것입니다. 콩잎이 호박잎처럼 커가는 동안에는 대풍이라며 좋아하셨답니다. 기다려도 꽃이 피지 않자 그제야 사태를 알아차리셨답니다. 콩에 대한 학문적 지식 없기는 지금도 매한가지지만 일정한 어둠이 있어야 꽃 피우고 열매 맺는다는 사실만큼은 확실히 깨달으셨답니다.
꽃 피워 열매 내는 식물에게 빛과 어둠이 “중단”의 부정성으로 상호작용하는 것은 필수적입니다. 특히 단일식물(일조 시간이 짧고 밤의 길이가 일정 시간보다 길어지면 꽃을 피우는 식물로서 콩, 메밀, 국화 등이 있음.)에게 어둠은 더욱 중요합니다. 거의 모든 사람들이 간과하고 지나가는 낮달 같은 진실입니다. 빛이 생명의 전제라는 사실만 유념할 따름입니다. 어둠도 필수적이라는 생각은 하지 않습니다. 많은 농부들조차 아직도 깨치지 못한 유구한 인습입니다.
어둠이라는 “중단”의 부정성이 아니라면 빛은 빛일 수 없습니다. 태양은 지구의 대지에 “빛의 점멸을 연출”하여 “두 개의 가장자리 사이”에서 “빛나는” “피부”, 그러니까 에로틱한 생명을 창조해냅니다. 빛에 드러나 “벌거벗은 몸을 지속적으로 전시”되는 대지의 포르노는 에로티시즘이 없습니다. 생명이 없습니다. 아니, 당최 생명일 수 없습니다.
결국 투명사회, 그러니까 포르노사회의 기획자는 생명의 멸절을 기획한 것입니다. 어찌 보면 지구의 미래를 위해 잘된 일일 수도 있습니다. 인간이 스스로 파멸하면 이 기적의 푸른 별은 더 오랫동안 다른 생명체의 낙원으로 존속할 수 있을 테니 말입니다.
그러나 우리 각자는 매순간 “사이”와 “점멸”의 틈을 찾아 아주 조금씩 옮겨가면서 에로티즘에 깃들어야 합니다. 투명사회에 금내는 일을 멈출 수 없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