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명사회
한병철 지음, 김태환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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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명성과 진리는 같은 것이 아니다. 진리는 다른 모든 것을 거짓이라고 선언함으로써 스스로를 정립하고 관철한다. 그 점에서 진리는 부정성이다. 정보의 증가와 축적만으로 진리가 성립하는 것은 아니다.·······과다 정보와 과다 커뮤니케이션은 바로 진리의 결핍, 존재의 결핍을 드러낼 뿐이다. 더 많은 정보, 더 많은 커뮤니케이션은 전체의 근본적인 불명료함을 제거하지 못한다.(26-27쪽)

 

말의 쓰임새에서 시대를 읽을 수 있습니다. 오늘날 진리라는 말처럼 조롱당하는 것도 드물지 않나 싶습니다. 진리가 돼지에게 던져진 진주가 된 것은 긍정사회 덕분입니다. “다른 모든 것을 거짓이라고 선언함으로써 스스로를 정립하고 관철”하는 진리가 긍정사회 속에서는 탐낸다고 해서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닌 탐욕의 대상일 수밖에 없습니다. 결국 조롱거리로 만들어서 가짜와 일치시키는 것으로 답을 찾습니다.

 

긍정사회의 완성도가 높아지면서 탐욕과 두려움, 그리고  무지의 삼두사三頭蛇에 제대로 물린 인간은 미친 듯 약을 찾아 나섭니다. 문제는 인간이 찾는 약이 해독제가 아니라는 데 있습니다. 인간은 진통제를 찾고 있습니다. 현대의학과 심리학에 세뇌 당했기 때문입니다. 진통제의 진리는 돈·향락·정보입니다. 돈·향락·정보에는 부정의 되먹임이 통하지 않습니다. 광란의 일방질주, 그 종착지가 다름 아닌 중독입니다.

 

중독의 극대화는 자본주의가 주도하고 있습니다. 자본주의의 쌍끌이는 소유와 소비입니다. 소유가 장엄입니다. 자신이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나 실제적 처분의 한계를 넘어선 소유는 허구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으므로 이 장엄은 가짜입니다. 소비가 숭고입니다. 자신이 누리고 있다고 생각하나 구체적 지각의 경계를 넘어선 소비는 허영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으므로 이 숭고는 가짜입니다.

 

가짜를 아무리 축적해도 진짜로의 질적 전환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소유가 생명이 될 수는 없습니다. 소비가 영혼이 될 수는 없습니다. 진통이 해독이 될 수는 없습니다. 해독은 소유를 내려놓고, 소비를 포기하고야 가능합니다. 돈·향락·정보에 부정의 되먹임을 걸어야 가능합니다. 부정의 되먹임은 “전체의 근본적인 불명료함”을 직시할 수 있게 합니다. “전체의 근본적인 불명료함”을 직시해야 진리 구축이 가능합니다.

 

진리는 선험적으로 정의될 무엇being이 아닙니다. 진리는 인간이 이치에 맞게 살아내어 그 내용을 채워가야 하는 과정becoming입니다. 과정으로서 진리는 긍정으로 투명해지는 정답이 아닙니다. 여러 개의 답이 공존할 수 있는 “전체의 근본적인 불명료함” 속에서 끊임없이 자신의 느낌과 알아차림과 받아들임을 “스스로를 정립하고 관철”하는 문제 제기입니다. 가령 아래 두 가지 현상을 놓고 곰곰 생각해봅시다.

 

한국인이 중산층 여부를 결정하는 기준은 이렇습니다. 부채 없는 30평대 아파트, 월급 500만 원 이상, 자동차 2000cc 급 중형차, 통장잔고 1억 이상, 해외여행 1년에 몇 회 이상. 미국인이 중산층 여부를 결정하는 기준은 이렇습니다. 자신의 주장에 떳떳할 것, 사회적인 약자를 도울 것, 부정과 불법에 저항할 것, 정기적으로 받아보는 비평지가 있을 것. 과연 누가 스스로 문제 제기를 하는 진리의 사람이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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