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늙어감에 대하여 - 저항과 체념 사이에서 ㅣ 철학자의 돌 1
장 아메리 지음, 김희상 옮김 / 돌베개 / 2014년 11월
평점 :
“단지 경멸받아 마땅한 조건 아래서 고른 죽음만이 부자유한 죽음이며, 때가 아닌데 선택한 죽음은 비겁자의 죽음이다. 인생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고른 죽음은 다를 수 있다. 자유롭고, 충분히 의식했으며, 외부로부터 그 어떤 습격도 받지 않았다.” 자유죽음에 열광하는 광인의 이야기다.(202쪽)
우리가 아무런 이의 제기 없이 어려서부터 배운 그림그리기 방식은 먼저 그리고 싶은 대상의 경계선을 그린 다음 나중에 그 내부를 색칠해서 채워 넣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치를 정확히 따지자면 본디 사물의 경계선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사물의 자체 연장延長이 멈춘 곳이 경계선처럼 보일 따름입니다. 말하자면 경계선은 관념의 산물입니다. 이 관념을 기축으로 그림을 그리는 것은 마치 보편적 방식인 듯 오해되고 있지만 그리스-서구 전통입니다. 동아시아나 고대헤브라이 전통은 처음부터 사물의 자체 영역을 채워 그리다가 그 연장이 멈춘 곳을 자연스럽게 경계로 받아들였습니다. 이른바 근대화, 아니 서구화가 진행되면서 망각된 진실 가운데 하나입니다.
삶과 죽음의 문제에서 이런 이치를 말씀드려보겠습니다. 인간이 유한한 생명현상으로서 그릴 수 있는 것은 삶의 내용뿐입니다. 죽음은 그릴 수 없습니다. 사후세계에 관한 이야기가 없는 것은 아니나 엄밀히 말하면 죽음을 삶의 또 다른 양상으로 보는 세계관에 터한 묘사이지 죽음 자체에 관한 것은 아닙니다. 죽음이란 삶의 내용이, 그 운동이 멈춘 다음의 알 수 없는 사태입니다. 산 사람이 죽음을 선택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산 사람은 자기 삶의 마지막 모습을 선택하고 그에 따른 연장을 멈출 수 있을 따름입니다. 장 아메리가 부자유한 죽음, 비겁한 자의 죽음, 자유죽음의 선택에 관하여 말한 모든 것은 그리스-서구 전통입니다. 장 아메리가 나중에(이 책의 4판 서문에 언급하고 내용에서도 자유죽음 문제를 바꾼 것과 『자유죽음』을 펴낸 것이 1977년이고 그 이듬해 그는 이를 실행에 옮겼습니다.) 선택한 자유죽음이란 죽음을 선택한 것이 아니라 삶의 마지막 시공간에 일어나는 생명사건을 주체적으로 선택한 것입니다.
비록 자신의 전통에 따른 어법을 구사했지만 장 아메리가 실제에서는 죽음의 자유를 구가한 것이 아니라 삶의 최종적 자유를 구가한 것이란 사실을 알 수 있는 근거가 있어 다행입니다.
“인생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그가 늙어감에 대하여 그토록 단호하고 결곡한 어법으로 일관한 것은 “인생을 사랑하는 마음에서”였습니다. 그토록 사랑한 인생이기에 마지막 사건의 선택과 실행도 그 사랑의 연장에서, 최고의 연장에서 극진히 치르고자 하였습니다. 자기 삶, 자기 생명에 대한 최고의, 최후의 예우이며 헌정이었습니다. 바로 이것이 장 아메리의, 장 아메리에 의한, 장 아메리를 위한 삶의 길이었습니다. 누구도 그의 죽음을 말해서는 안 됩니다. 누구도 그의 죽음을 말할 수는 없습니다. 누구든 그가 사랑한 그의 인생을, 삶을 말해야 합니다. 누구든 그가 사랑한 그의 인생을, 삶을 말할 수 있습니다.
비인간적 권력집단 나치에 맞서 싸운 전사 장 아메리가 치열하게 말해온 늙어감과 죽음이 이야기를 읽고 이제 여기 우리가 뼈에 새길 것은 생명의 존엄과 삶의 자유라는 사실이 분명해졌습니다. 장 아메리의, 장 아메리에 의한, 장 아메리를 위한 삶이 곧 우리 자신의, 우리 자신에 의한, 우리 자신을 위한 삶입니다. 그 선택의 즉각적 결과는 전혀 중요하지 않습니다.
여전히 논쟁중인 안락사나 존엄사 문제에 대하여 관점을 정면으로 뒤집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죽음을 말하기 때문에 대뜸 살인죄 문제가 대두되는 것입니다. 삶을 말해야 도리어 인권과 존엄의 문제가 옹골차게 논의될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의 세월호사건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비인간적 권력이 저지른 가장 극악무도한 패악은 아이들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것 자체가 아닙니다. 자기 생명과 삶을 사랑하는 아이들의 마음을 짓밟고, 자유로운 선택을 가로막은 것입니다.
“가만히 있으라.”
이 한 마디가 칼보다, 총보다, 더 잔악무도한 흉기였습니다. 이 흉기는 세월호선장의 것이 아닙니다. 이 흉기는 매판독재반통일 권력집단의 것입니다. 이 흉기는 단순 사건으로 나타난 것이 아닙니다. 일천오백 년 매판독재반통일 역사의 집장태集藏態로 나타난 것입니다.
이제 대한민국이 참된 국가이려면, 그 국가가 우리 자신이려면 세월호사건, 그러니까 아이들의 원통하고 참혹한 죽음 이후, 우리의 삶은 우리의, 우리에 의한, 우리를 위한 삶으로 혁명적 전환을 기해야 합니다. 장 아메리의 자유죽음은 맹골수도 바다 건너에 남겨진 우리의 자유삶이여야 합니다. 장 아메리가 그 곡진함으로도 뚫지 못한 삶과 죽음의 화쟁和諍은 오늘 여기 우리의 과제로 남습니다. 자기만의 행복을 넘어 공공의 삶에 참여함으로써 큰 수레의 장엄한 삶을 살다 간 장 아메리를 다시 한 번 온 영혼으로 추모하며, 아직 추모해서는 안 될 아이들을 온 영혼으로 끌어안습니다. 부디 죽음의 신화는 역사가 되고 삶의 역사는 신화가 되는 날 오기를! 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