늙어감에 대하여 - 저항과 체념 사이에서 철학자의 돌 1
장 아메리 지음, 김희상 옮김 / 돌베개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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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어라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끈질긴 느낌인 ‘두려움’. 그것은 쉽게 놓아주지 않는 질긴 손길로 내 인격의 일부가 되었다. 그래서 나는 “두려움을 가졌다”라고 말할 수가 없다. 오히려 “나 자신이 두려움이다”라고 말할 따름이다.(195쪽)

 

지난 일주일은 슬픔과 분노, 그리고 허탈이 뒤범벅된 나날들이었습니다. 세월호사건 일주기중심의 정국이 될 수밖에 없었는데 권력집단이 보여준 행태는 오로지 패악과 협잡뿐이었습니다. 국정, 아니 바로 이 세월호사건 최고책임자는 국가를 이탈하였습니다. 정치권 수뇌부는 재보선에 정신 팔고 있었습니다. 그 사이 식민지 경찰은 유족과 시민에게 캡사이신과 물대포를 쏘아댔습니다. 희생된 아이의 부모를 목 조르고 방패로 찍었습니다. 신문기자를 포함한 시민 100여 명을 연행하였습니다. 이 때 동원된 경찰병력은 무려 172개 부대 13,700명이었습니다. 차벽트럭 28대를 비롯한 470여 대 차량으로 이른바 ‘산성’을 쌓고 시민과 유족의 이동을 가로막았습니다. 전쟁을 방불케 하는 이 상황의 진실을 관제언론은 보도하지 않았습니다. 도리어 유족과 시민을 폭도로 모는 왜곡 보도를 자행하였습니다. 익숙한 풍경입니다. 이 익숙함에 실려 목하 대한민국은 깊은 두려움 속으로 침륜되어 가고 있습니다.

 

두려움. 그것은 이제 대한민국 국민 각자의 인격의 일부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두려움을 가졌다”라고 말할 수가 없습니다. 오히려 “나 자신이 두려움이다”라고 말할 따름입니다. 크게는 전쟁 위협에서 작게는 집회 현장의 ‘채증’ 위협까지 도무지 헤어날 길 없는 두려움을 내재화한 채 숨죽이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바로 이것이 권력집단이 노상 훤화喧譁하는 바, 국론통일이며 민생안정입니다. 스스로 두려움이라는 정체감을 지니는 국민. 이것은 저 일제가 규정한 황국신민皇國臣民입니다. 우리는 민주주의 국가의 주권자인 국민이 결코 아닙니다. 절대적 권위 아래 무릎 꿇어야 하는 신민에 지나지 않습니다. 두려움이 휘몰고 온 저주입니다. 아, 감히 어쩌지 못 할 이 국가적 차원의 도저한 두려움이라니.

 

두려움은 숙명에 육박하는 무게를 지녔습니다. 두 가지 근거가 있습니다. 하나는 두려움에 사로잡히면 옴짝달싹 못한다는 것입니다. 폭력성 때문입니다. 또 하나는 두려움의 대상에 의심을 품기 어렵다는 것입니다. 초월성 때문입니다. 이 두 가지 무기를 다 가지고 있는 두려움의 생산자는 죽음입니다. 죽음을 움켜쥐고 두려움으로 광범위하게 우리를 억압하는 세 주체가 바로 정당성 없는 권력과 매판 자본, 그리고 타락한 종교입니다. 지금 우리사회가 안고 있는 치명적인 위험성은 바로 이 세 주체의 동맹이 더없이 강고하다는 것입니다.

 

국가의 보호에 깃들면, 자본의 풍요에 실리면, 종교의 구원에 기대면 두려움이 사라질 것이라 여겨 너나없이 충성하고 헌신하고 몰두한 결과, 도리어 노예가 되어버린 이 국민에게 역사가 베푸는 자비란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수탈과 살해가 반복될 뿐입니다. 그러면 대체 이 땅에 태어나 겪을 수밖에 없는 이 모멸에서 어찌 하면 벗어날 수 있을까요?

 

첫 걸음은 이것입니다. “나 자신이 두려움이다.” 장 아메리의 고백owning을, 그 직시를 온 영혼으로 하는 것입니다. 직시한 두려움이 바로 용기임을 깨닫는 것입니다. 할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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