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늙어감에 대하여 - 저항과 체념 사이에서 ㅣ 철학자의 돌 1
장 아메리 지음, 김희상 옮김 / 돌베개 / 2014년 11월
평점 :
보라, 부자의 삶은 가난한 자의 빈곤한 그것과 엄청나게 다르다. 그렇다면 거듭 이렇게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모두 죽음 앞에서 평등하다고 하지만, 죽어가는 과정에서조차 평등하지 않다.·······돈만 있다면 죽음도 훨씬 더 편안하게 맞는다.(177쪽)
거대 부역언론은 한사코 덮고 비틀었지만 1년 전 많은 사람들이 의문을 품었습니다. “아이들 부모 가운데 국회의원 한 명만 있었어도 저렇게 했을까?” 실제로 권력과 그 주구들은 아이들 부모의 가난을 비아냥거렸고 배·보상금 문제를 띄우며 시체장사 운운하였습니다.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엄마가 준 용돈을 되돌려준 아이가 있었습니다. 새로 사준 운동화를 끝내 신지 않은 아이가 있었습니다. 열심히 공부해서 엄마 고생 면하게 해드리겠다 약속한 아이가 있었습니다. 맞습니다. 그들은 가난했습니다. 가난했기 때문에 죽임을 당했습니다.
수백 명 죽여 봤자 가난한 부모들이 할 수 있는 일이 없을 것을 계산했을 터입니다. 배·보상해 봤자 부자들의 그것에 비해 푼돈일 것임을 계산했을 터입니다. 가난은 개인적 무능으로 몰고, 진상규명 요구하면 무능한 자들이 떼쓴다고 몰면 된다는 계산을 했을 터입니다.
살아서는 가난했던 아이들의 꿈을 모독하던 국가가 가난을 표적 삼아 죽여 놓고 그 죽음을 다시 모독하고 있습니다. 살아 있을 때 아이들한테 한없이 미안하게 만들었던 국가가 눈앞에서 아이들을 죽여 그 부모의 가슴을 다시 갈기갈기 찢고 있습니다. 과연 전능합니다.
가난한 사람의 삶을 털어 부자에게 돈을 더해주는 국가가 가난한 사람의 죽음까지 털어 부자에게 편안을 더해줍니다. 매판자본이 성육신한 이 국가는 이렇게 신이 됩니다. 가난한 사람은 ‘완전’ 고통스럽게 살다가 ‘완전’ 고통스럽게 죽어갈지어다. 신의 거룩한 계명입니다.
삼백예순네 번째 날이 밝아 삼백예순네 번째 고통스러운 죽음을 맞고 있는 가난한 사람들을 아랑곳하지 않고 휘파람 불며 즐거운 ‘이탈’을 준비하는 무리가 있습니다. 그 무리의 행복한 휘파람은 가난한 사람들의 살해를 지시하는 잔혹한 시그널 음악임이 분명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