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늙어감에 대하여 - 저항과 체념 사이에서 ㅣ 철학자의 돌 1
장 아메리 지음, 김희상 옮김 / 돌베개 / 2014년 11월
평점 :
·······'sub specie aeternitatis', 곧 영원의 관점에서 바라보려 한다는 것은 아무 것도 보지 않겠다는 태도·······다.(164쪽)
하루살이가 나비와 놀았습니다. 날이 저물었습니다. 나비가 하루살이에게 말했습니다. “내일 또 놀자.” 하루살이는 고개를 갸우뚱 했습니다. 나비가 참새와 놀았습니다. 계절이 저물었습니다. 참새가 나비에게 말했습니다. “내년 봄에 또 놀자.” 나비는 고개를 갸우뚱 했습니다.
하루살이에게 내일은, 나비에게 내년 봄은, 인간에게 영원과 같습니다. 기껏 살아야 백 년 남짓인 인간이 “영원의 관점”을 지닌다는 것은 당최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럴 수 있다 하여도 이미 그것은 비인간 이야기입니다. 인간은 오직 찰나적으로 나타나는 영원의 홀로그램을 얼핏 볼 수 있을 뿐입니다. 그것을 ‘관점을 지녔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이 경계를 넘어 직관이나 상상으로 떠드는 영원이라면 허영 또는 탐욕임에 틀림없습니다.
기독교가 말하는 천국·영생, 불교가 말하는 극락·열반 대부분 이런 차원에서 회자되고 있습니다. 그들은 너무나 허랑하게 영원을 말하기 때문에 앞마당을 세속 권력과 자본주의에 내주고도 반성할 줄 모릅니다. 영생을 누릴 천국이 본향이라면서, 이 세상은 나그네 삶이라면서, 독재 세력과 한 통속이 되어 호가호위하는 대형교회 목사와 고위직 신부들을 우리는 익히 보아왔습니다. 도를 깨쳤다면서, 살아 있는 부처라면서, 매판 세력과 한 통속이 되어 수탈체제에 부역하는 ‘큰스님’들을 익히 보아왔습니다. 감당할 수 없는 거대한 관념 언어에 자신을 일치시킨 자들 때문에 빚어진 비인간 이야기입니다.
긴 세월 동안 거짓된 “영원의 관점”을 전유해왔던 종교가 그 패권을 자본에게 넘긴 오늘날, 감당할 수 없이 많은 돈을 가진 극소수 사람들이 최상품의 거짓된 “영원의 관점”을 소유한 채 저주의 역사를 쓰고 있습니다. 가령 대한민국은 소득 상위 10%가 전체소득 48.05%를, 하위 40%는 불과 2.05%만을 가져가는 사회입니다. 그 격차는 양극으로 갈수록 더욱 벌어집니다. 대한민국 상위 1%는 그 감당할 수 없이 많은 돈과 자신을 일치시킵니다. 그 영원한 돈의 은총으로 그들만 모든 것을 압니다. 그들이 아는 것만 진실입니다. 그 영원한 돈의 은총으로 그들만 모든 것을 합니다. 그들이 하는 것만 선입니다. 이렇게 그들은 비인간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비인간이 인간을 잡아먹고 있습니다. “영원의 관점”을 영원히 내려놓는 길만이 인간의 존속 조건일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