늙어감에 대하여 - 저항과 체념 사이에서 철학자의 돌 1
장 아메리 지음, 김희상 옮김 / 돌베개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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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자신으로부터 소외된 동시에 비로소 자기 자신이 된다는 역설이랄까. 그 극단에 빠진 경우가 바로 나르시시즘에 사로잡힌 멜랑콜리다.(66쪽)

 

장 아메리가 멜랑콜리를 의학적 우울장애와 같은 의미로 썼는지 정확히 알 수 없지만, 그렇다고 가정할 경우, 놀랍게도, ‘우울증은 마음의 감기다’ 운운하는, 그러니까 우울장애를 기분장애 정도로 생각하는 미국식 주류의학보다, 의학과 무관한 그가 우울장애의 본질을 훨씬 더 정확히 이해하고 있는 것입니다. 멜랑콜리를 나르시시즘과 모순관계에 놓고 그것이 한 인격 속에 역설적으로 공존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으니 말입니다.

 

우울장애는 단순한 기분장애가 아닙니다. 깊고 질긴 우울감은 우울장애의 증상에 지나지 않습니다. 우울장애의 핵심은 자기인정·자기신뢰의 붕괴입니다. 비교적 가벼운(!) 정도의 자기비하에서 무거운 자기무화無化까지 일련의 자기부정 스펙트럼이 드러내는 병리적인 양상을 우울장애라 합니다. 우울장애의 모든 증상은 이 자기부정에서 비롯한 것입니다.

 

자기부정의 경향성이 깊어질수록 그 맞은편에 뚜렷이 맺히는 허상이 있습니다. 나르시시즘입니다. 나르시시즘의 근원은 자기를 부정하게 하는 허구적 대전제인 이상적 자아상입니다. 이 이상적 자아상은 대개 순수·지선至善·진정성 등의 윤리적 결곡함을 속성으로 지닙니다. 윤리적으로 완벽한 자아상에 대한 애착이 바로 나르시시즘입니다. 이 허상의 기준점이 높을수록 나르시시즘은 멜랑콜리를 강화합니다. 멜랑콜리가 강화될수록 나르시시즘이 강화됩니다. 인과因果가 맞물린 채 악무한으로 치달아갑니다. 이것이 우울장애의 자기운동입니다.

 

세밀히 말하자면 우리가 흔히 말하는 우울장애는 ‘단극單極성’우울장애입니다. 나르시시즘이 멜랑콜리 울타리 안으로 포개져 들어가 있는 것입니다. “나르시시즘에 사로잡힌 멜랑콜리”라는 장 아메리의 말을 좀 더 정확하게 표현하면 “나르시시즘을 사로잡은 멜랑콜리”입니다. 이에 비해 흔히 조울증이라고 말하는 ‘양극兩極성’장애는 나르시시즘과 멜랑콜리가 둘로 쪼개져서 널을 뛰고 있는 것입니다.

 

나르시시즘과 멜랑콜리는 본디 대칭 구조를 이루는 양극입니다. 둘은 온전히 포개진 하나여서도 안 되고 온전히 쪼개진 둘이어서도 안 됩니다. 이런 극단에 육박한 것일수록 심각한 질병입니다. 전자를 우울장애라 하고 후자를 양극성장애라 합니다. 하나도 아니고 둘도 아닌 상태가 유지되도록 역동적 거래가 이루어질 때, 그러니까 모순이 역설적 공존 운동을 할 때 건강한 것입니다.

 

역동적 거래니 모순의 역설적 공존 운동이니 하는 따위의 말을 애써 만들었지만 실재를 엄밀하게 드러내기 어렵습니다. 장 아메리의 말을 다시 한 번 떠올리는 것이 더 좋겠습니다.

 

몸은 가지지 않아야 완전히 소유한다. 다시 말해서 느껴지지 않는 몸이 건강하다.

 

자기긍정의식도 자기부정의식도 “가지지 않아야” 건강한 마음을 소유하는 것입니다. 자만도 자학도 “느껴지지 않는” 마음이 건강한 것입니다.

 

완전한 건강을 자랑하는 사람은 자기 자신에게 머무르지 않는다.······건강한 사람은 세상의 일과 사건에 충실할 따름이다.

 

마음이 완전하게 건강한 사람은 자기 마음 안에 “머무르지” 않습니다. 마음이 건강한 사람은 “세상의 일과 사건에 충실할 따름”입니다. 나르시시즘에 머무르는 사람은 세상의 일과 사건을 먹어치웁니다. 멜랑콜리에 머무르는 사람은 세상의 일과 사건에 먹히고 맙니다. 마음이 건강한 사람은 세상의 일과 사건에 충실할 따름입니다.

 

마음의 이러한 논리는 곧장 사회정치 현실로 이어집니다. 나르시시즘에 걸린 상위 1%는 제 곳간만 채웁니다. 멜랑콜리에 걸린 다수 민중은 제 곳간을 털립니다. 건강한 중산층이 든든하게 형성되어야 사회를 인간다움으로 가꿀 수 있습니다. 지금 우리사회는 나르시시스트의 악정으로 중산층이 급격하게 몰락하고 있습니다. 양극화사회로 돌진하고 있습니다. 중증 정신장애의 폐쇄병동으로 급변하고 있습니다. 나르시시스트가 도발한 세월호사건, 이것이야말로 우리사회의 병적 상황을 극명하게 드러낸 대표적 증상입니다. 그 진실 규명 여부가 이후 우리사회의 향방을 결정할 것입니다. 멜랑콜리에 빠져들어 거기 머무르지 않으려면 평범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과연 무엇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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