늙어감에 대하여 - 저항과 체념 사이에서 철학자의 돌 1
장 아메리 지음, 김희상 옮김 / 돌베개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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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반항을 시작한 사람은 다른 이들과 어울릴 수 없다. 그는 세상에 조롱거리가 될 수밖에 없다. 결국 자신을 스스로 비웃지 않을 수 없다. 생각할 수 없는 것을 생각하고자 안간힘을 썼기 때문이다.(51쪽)

 

지난 해 한가위, 세월호사건 진실 규명을 촉구하는 여러 시민들과 함께 광화문에서 단식을 하였습니다. 의자醫者인 만큼 여러 날 단식 중이신 분들의 건강상태를 살피고 간단한 치료도 하였습니다. 저는 거기서 국가가 왜 아이들을 죽였는가, 질문하는 시민을 조롱하는 자들을 보았습니다. ‘종북세력 북한으로 가라’는 현수막 걸어놓고 찬송가를 부르는 개신교집단이었습니다. 오후, 청운동 주민 센터에서 농성중인 가족을 찾아가 건강상태를 살피고 간단한 치료를 했습니다. 저는 거기서도 국가가 왜 아이들을 죽였는가, 질문하는 가족을 조롱하는 자들을 보았습니다. 짐짓 진지하게 실은 시시덕거리며 사사건건 가족을 통제하고 있는 경찰병력이었습니다.

 

가족은 자신을 스스로 비웃었을까요? 생각해 마땅하지만 현실적으로 생각할 수 없는 것을 생각하고자 안간힘을 썼으니 말입니다. 세상은 저 개신교집단과 경찰로 대표되는 부류가 하는 생각만이 생각할 수 있는 생각이니 말입니다. 생각할 수 없는 것을 생각하고자 안간힘을 쓴 것은 맞지만 가족은 스스로 비웃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아이들의 죽음을 앞에 놓고 어찌 그럴 수 있었을 것입니까. 아이들한테 미안해서 그러지 못했을 것입니다. 아이들한테 부끄러워서 그러지 못했을 것입니다. 가족은 필경 목숨 걸고 국가 앞에 서 있었을 것입니다. 국가의 실체를 알아가는 저 혹독한 과정에서 자조自嘲할 틈이 있었다면 수도 없이 자책自責을 했을 테지요.

 

모름지기 이런 상황에서 스스로 비웃을만한, 아니 그럴 수밖에 없는 사람은 저와 같이 비굴한 소인배가 아닐까 싶습니다. 조롱하는 인면수심 저 무리에 차마 가담할 수는 없으되 마땅히 내로라하고 할 일도 없으니 마음만 똥마려운 강아지마냥 낑낑거리기를 거듭할 따름입니다. 되도 않는 글 한 줄 써놓고도 가슴이 벌렁거립니다. 이런 저런 관련행사 기웃거리다 알량한 손길 남기고 와서는 마음의 짐을 뒤적거립니다. 진료 쉬는 날이면 거의 어김없이 모순의 언저리만을 배회하다 돌아옵니다. 이도 저도 아닌 변방에서 자기 자신의 삶이 아닌 것만 같은 삶을 살아가면서 찰나마다 느끼는 도저한 남루襤樓. 존재 자체에 대한 우울로 육박하는 웅숭깊은 자조.

 

나치에 맞서 싸운 레지스탕스 장 아메리가 느끼는 자조는 저 같은 무지렁이가 느끼는 것과는 아무래도 다를 것입니다. 생각할 수 없는 것을 생각하고자 안간힘을 쓴 것은 같다 하더라도 그 생각을 실천에 옮기기 위해 한 행위는 사뭇 다르기 때문입니다. 체포되어 수용소에서 가혹한 폭력에 시달리면서 느끼는 형언할 길 없는 감정 일부로서 자조라면 더욱 잔인할 수 있습니다. 그러고 보면 자조조차 변두리 경험에 머무르고 만다는 자조에 휩싸이기 십상인 것이 제 운명이지 싶습니다. 단. 이 운명이 굴레가 되지 않게 하기 위해 저는 남은 삶의 시간 모두를 들여 딱 한 글자만을 바꾸려고 합니다. 자조自嘲에서 자조自照로. 있는 그대로 들여다보면 바뀔지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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