늙어감에 대하여 - 저항과 체념 사이에서 철학자의 돌 1
장 아메리 지음, 김희상 옮김 / 돌베개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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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부터 실패할 수밖에 없는 살아 있음과 덧없이 흐르는 시간을 둘러싼 성찰이 너무 힘든 나머지 우리를 광기로 몰아가거나 심지어 자살하도록 충동한다 할지라도, 정신이상이나 자기파괴라는 불합리함 속에서 마침내 모순은 해결된다.(51쪽)

 

나카자와 신이치의 『예술인류학』에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통합실조증(정신분열증의 일본식 표현으로 우리나라에서는 조현병이라 함.) 전문가인 의사 마테 블랑코는 통합실조증 환자에게 특징적으로 나타나는 사고법이 ‘대칭성 논리’를 바탕으로 한다는 것을 밝혀내는데 성공했습니다. 말에 의해 유지되는 시간 질서를 무시하기도 하고, 평범한 사고에서는 명백히 모순으로 여겨지는 논리를 아무렇지 않게 전개시키기도 하며, 부분적인 것을 항상 우주 전체적인 것으로 받아들이려 하는 식으로, 통합실조증에서는 명백히 ‘대칭성’의 특징을 갖는 사고가 일상생활의 한가운데로 부상합니다. 마테 블랑코는 이것을 단순한 병리 현상으로 취급하는데 반대하며, 오히려 ‘대칭성의 지성’ 속에서 가장 원초적인 ‘인간의 징표’를 발견하려 했습니다.”

 

나카자와 신이치는 이 대칭성의 지성을 ‘유동적 지성’이라 표현하면서 ‘모순을 끌어안은 채 전체 사고를 하는 직관지’라고 정의하였습니다. 그는 이 유동적 지성을 자신이 구축하고자 하는 이른바 대칭성인류학의 출발점으로 삼는다고 선언하였습니다. 매우 올바르고 참된 사유입니다. 대단합니다. 이 대단함은, 이미 1400년 전 원효가 이 사유를 완성하였다는 진실을 모르는 한에서만 타당합니다.

 

논의의 핵심은 물론 모순의 문제입니다. 장 아메리에게도 이 문제의식은 마찬가지라는 사실, 이미 여러 번 말씀드렸습니다. 장 아메리의 자세가 마테 블랑코, 나카자와 신이치와 사뭇 다르다는 데서 우리의 논의는 시작됩니다.

 

장 아메리가 광기 상태를 표현한 ‘정신이상’이 나카자와 신이치가 말하는 통합실조증, 그러니까 정신분열증과 동일한 것이다, 라는 사실을 일단 전제하겠습니다. 이 때, 장 아메리의 문맥은 광기로서 정신이상이, 불합리함이라는 조건 아래, 모순의 문제를 해결하는 계기로 작동한다는 쪽으로 흐릅니다. 다시, 이 때, 불합리함은 그러면 장 아메리의 어떤 정서를 담고 있는 것일까요? 물론 정확히 알 수 없습니다만 느낌은 그것이 단순한 레토릭은 아니라는 쪽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 이후 모든 서양 지식인의 어법 그대로 “말도 안 되는”·······뭐 이런 뉘앙스 아닐까요. 이렇게 해석해야 그 다음 난관이 참 난관이 됩니다. 그러니까 정신이상(정신분열증)이나 자기파괴(자살)로 문제가 “말도 안 되는” 차원에서 해결(!)된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도 그럴 것이, 정신이상은 모순을 둘로 딱 쪼개어 방치했다는 뜻이고, 자살은 모순을 못 견뎌 죽음 하나를 선택했다는 뜻이니까 말입니다. 결코, 해결이 아닙니다. 이 아니 난관인가요.

 

모순의 해결은 그것을 끌어안고 전체를 사고해야만 길이 열립니다. 장 아메리의 ‘정신이상’은 길이 아닙니다. 장 아메리의 ‘자살’은 길이 아닙니다. 적어도 이 문맥에서는 끌어안지 않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끌어안지 않으면 전체를 확보할 수 없습니다. 전체를 확보하지 못한 부분은 언제나 극단과 극단 사이에서 널을 뜁니다. 그 널뜀은 널뜀으로 영원합니다. (전체란 말에 알레르기 반응을 일으킬 수 있다는 사실을 모르지 않습니다. 여기서 전체는 모순구조에 전제된 그것 이상도 이하도 아닙니다. 오직 진실의 실상을 가리킬 뿐입니다.)

 

모순의 해결은 아마도, 아니 필경 우리 논의의 마지막에야 그나마 그 실루엣을 드러낼 것입니다. 이 골짜기에는 다만 정신이상과 자기파괴 사이, 나카자와 신이치의 저 ‘유동적 지성’을 복병으로 심어 놓고 떠나겠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에게는 원효라는 위대한 본진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두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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