늙어감에 대하여 - 저항과 체념 사이에서 철학자의 돌 1
장 아메리 지음, 김희상 옮김 / 돌베개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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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라는 이름의 과거는 엄존한다. 기억하지 않아도 순수한 감정으로, 직접적이며 그 어떤 매개도 필요로 하지 않는 감정으로 존재한다.······이로써 시간은 ‘순수시간’이 된다. ‘내면의 감각’을 고스란히 현재로 보여주는 게 순수시간이다.(48-49쪽)

 

과거와 현재 사이의 경과·간격을 단숨에 무너뜨리는 순수시간, 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감정으로 존재’하는, 그러니까 ‘감정인’ 시간, 다시 그러니까 ‘감정시간’의 진실을 포착해낸 장 아메리의 경이로운 감각이야말로 이 책에서 가장 빛나는 보석이라고 감히 확언합니다.

 

성급과 독선의 냄새를 풍기는 저의 이런 단호함은 감정의 상처 문제를 끌어안고 살아낸 오랜 시간의 체험에서 비롯하였습니다. 불안과 우울로 대표되는 감정의 병에 시달리는 수많은 사람들과 함께하는 동안, 감정(으로서) 인간이 감정(으로서) 시간을 얼마나 어떻게 아파하는지 생생하게 느끼고 알아차리고 받아들여 왔습니다. 저 또한 전적인 타자나 초월적 존재가 아닌 까닭에 감염되고 더불어 치유되는 일을 거듭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면서 증득證得할 수 있었습니다. 아픈 기억의 에피소드가 사라진 자리에 감정만이 남는다는 것, 그렇게 남은 감정은 시간에서 간격을 없앤다는 것, 간격이 제거된 시간은 영원한 현재라는 것, 영원한 현재는 절대 경직이라는 것.

 

이 통찰은 매우 결정적입니다. 과거와 현재가 포개지는 일은 현재와 미래 사이에서도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장 아메리의 통찰에서는 드러나지 않은 진실 가운데 의학적인 면을 살펴보면 알 수 있습니다. 감정시간의 형성에는 후각과 대뇌변연계-흔히 감정뇌라 함-의 핫라인이 작용합니다. 이 핫라인은 즉각적·자동적·반복적 가동성을 갖추고 있습니다. 임상에서는 보통 “길을 냈다.”고 표현합니다. 길을 따라 생각이 번지는 것은 불가피합니다. 이렇게 번지는 생각은 시간의 경과·간격을 무화無化시킵니다. 장 아메리가 늙어감에 대하여 전개한 생각도 이 길을 따라서 한 것입니다. 장 아메리의 사유가 매순간 극한의 지점에서 팽팽한 긴장을 유지한 까닭이 여기에 있습니다.

 

장 아메리에게 흘러간 시간이란 없습니다. 회한의 과거란 없습니다. 모든 시간, 모든 과거는 일렬횡대의 현재일 뿐입니다. 늙어감도 여기에 귀속됩니다. 죽음도 여기에 귀속됩니다. 의자醫者인 제 관점에서 본다면 그는 순수시간을 알았으므로 감정시간을 앓았던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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