늙어감에 대하여 - 저항과 체념 사이에서 철학자의 돌 1
장 아메리 지음, 김희상 옮김 / 돌베개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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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은 내적 감각이라는 형식을 취한다.(28쪽)······시간은 언제나 우리 안에 있다. 공간이 우리를 둘러싸고 있듯.(32쪽)······늙어가는 사람은 자기 안에 쌓인 시간을 인생으로 기억해야 한다.(39쪽)

 

우리사회에서 생각 있는 사람들한테 존경 받는 어른 가운데 신영복 선생님이 계십니다. 박정희 정권이 조작한 통일혁명당사건으로 20년 넘게 감옥살이를 하셨던 분입니다. 선생님의 글 중에 이런 요지의 내용이 있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오랫동안 감옥의 좁은 독방에서 살아온 사람은 석방되고 나서 툭 트인 거리를 걷다가도 문득문득 걸음을 멈추게 된다. 몇 발자국 걷지 않아 맞닥뜨리는 벽에 대한 기억 때문이다.”

 

시간은 내적 감각으로 형성되고 쌓여 인생으로 기억된다는 장 아메리의 말이 소환해낸 오래된 제 기억입니다. 장 아메리의 수용소 삶 또한 본질적으로 이와 동일한 시간이었습니다. 아니, 뼈가 으스러지도록 고문당하고 언제 가스실로 끌려가 죽을지 모르는 아우슈비츠라면 훨씬 더 극단적·배타적 시간이었음에 틀림없습니다.

 

밖으로 한 치도 확산될 수 없는 영어囹圄의 시간, 죽음과 그대로 맞닿아 있는 시간, 이것이 바로 장 아메리를 짓누르고 있는 “늙어감”입니다. 다짜고짜 죽음으로 몰아쳐가는 노도의 시간 앞에서 “늙어감”이란 어감이 주는 경과의 느낌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생물학적 연령 여하도 부질없습니다. 찰나마다 죽음이 엄습해오는 장 아메리의 “내적 감각”으로는 시간도 “늙어감”도 점點적 진실일 수밖에 없습니다. 하여 그의 사유는 극한으로 밀어붙여지기를 거듭합니다. 시간은 곧장 “늙어감”으로, “늙어감”은 곧장 죽음으로, 죽음은 곧장 절대허무로.

 

오늘 아침 어느 신문을 보니 죽음에 대한 특별한 사유체계를 지닌 티베트 승려와 인터뷰한 기사가 크게 실렸습니다. 죽음은 끝이 아니고 다른 삶의 시작이라는 익숙한 이야기가 오늘따라 진부하게 들리지 않았습니다. 물론 그 승려의 뜻과는 사뭇 다른 이야기지만 사실 그 동안 저 역시 맹골수도 영령들에게 삶과 죽음을 가로질러 와 이 땅의 새로운 역사가 되어주기를 323일째 간절히 빌어 왔기 때문입니다.

 

불현듯 장 아메리가 떠올랐습니다.

 

“그가 당한 폭력, 그가 느꼈을 공포와 절망, 거기서 그가 살아낸 시간의 무게, 단도직입으로 그에게 다가오는 죽음의 냄새·······이 조건에서 죽음 너머를 사유하는 것은 안일하거나 호사스러운 관념놀이였을까. 명상이나 선 수행을 통해 빚어낸 이야기와 고문을 당하며 빚어낸 이야기가 다를 수밖에 없다면 진실이라는 것도 인연의 문제, 아니 어쩌면 선택의 문제가 아닐까. 깨달아야 할 진리를 못 깨달았다고 그에게 말할 수 있을까.”

 

장 아메리를 부둥켜안은 채, 저는 또 저의 운명시간을 따라 두 손을 모읍니다. 하루를 살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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