늙어감에 대하여 - 저항과 체념 사이에서 철학자의 돌 1
장 아메리 지음, 김희상 옮김 / 돌베개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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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나 지금이나 나는 늙어가는 사람, 노인이 감당해야만 하는 비참한 운명의 짐을 덜어주기 위해 사회가 모든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고 믿는다. 그리고 동시에 나는 이런 방향으로 이루어지는 모든 고결하고 귀중한 노력이 아마도 약간의 아픔을 덜어주기는 하겠지만, 말하자면 무해한 진통제와 같다는 의견을 여전히 고집하고 싶다. 다시 말해서 그런 노력은 늙어감이라는 비극적 불행에 있어서 어떤 근본적인 것도 바꾸거나 개선할 수 없다.(11쪽)

 

유한한 생명으로서 인간에게 죽음은 불가피하다는 이치로 보면 늙어감이란 그 이치를 따라 일어나는 당연한 과정입니다. 이 진실을 모를 리 없는 장 아메리가 구태여 늙어감에 대하여 “비참한 운명의 짐” 또는 “비극적 불행”이라는 어두운 규정을 내리고 거기 터하여 추상같은 사유를 벼리는 연유가 무엇일까요? 이 의문은 책이 끝날 때까지 사라지지 않습니다.

 

인간의 늙어감이 개인의 생물학적 층위에서만 진행된다면 아마도 문제는 훨씬 더 간단명료했을 것입니다. 사회문화적 정치경제학적인 층위에서 소외와 불평등, 심지어 수탈의 형태로 진행되므로 문제에는 복잡한 주름이 잡히고, 다단한 결절이 맺힙니다. 이런 주름과 결절은 생물학적 늙어감에 비참함과 비극성을 더 깊이 새겨 넣어 “근본적인 것”을 형성합니다.

 

근본적인 것”은 처음부터 사회 또는 국가의 몫이 아니었습니다. 사회 또는 국가가 바로 그 “근본적인 것”을 야기하고 강화한 원죄의 주체이기 때문입니다. 정치도 법도 제도보장도 그 원죄를 덮고 가려는 장치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 효과는 당연히 “진통제” 수준입니다. 설혹 그 장치에 “고결하고 귀중한 노력”이 깃들어 있다 하더라도 본질은 동일합니다.

 

근본적인 것”이 사회적 정체성을 분명하게 지님에도 사회가 풀 수 없는 문제라면 대체 그 “근본적인 것”이란 무엇일까요? “근본적인 것”은 개인과 사회의 경계에서 일어난 경험사건이 해체 변화를 일으킬 때 나타나는 외상外傷적traumatic 상실입니다. 사는 동안 상실은 불가피합니다. 문제는 외상 상황입니다. 장 아메리의 심장은 늘 여기서 뛰고 있습니다.

 

“나는 나치에 맞서 싸우는 레지스탕스 전사다. 잡힌다. 죽음의 수용소에 갇힌다. 뼈가 으스러지는 고문을 받는다. 탈출한다. 다시 잡힌다. 다시 죽음의 수용소에 갇힌다. 다시 고문을 받는다. 나치가 패망한다. 나는 내 자신의 이름을 버린다. 다른 이름으로 살아간다. 지금의 삶은 지난날의 삶과 정녕 같은 것일까. 나는 과연 내 자신을 간직하고 있는 것일까.”

 

장 아메리의 현재에 대한 질문은 늘 과거의 극한 경험과 연동되어 일어납니다. 시차는 없습니다. 오직 삶의 차이가 극한의 질문을 이끌어냅니다. 그는 자신을 의학의 눈으로 보지 않았습니다. 외상을 인식하지 않았습니다. 치유를 염두에 두지 않았습니다. 매순간 격정emotionalism 상태를 살았습니다. 격정은 삶의 모든 순간을 근본적인 것으로 만듭니다.

 

결국 삶 자체가 근본적인 것이므로 그는 단 한 순간도 “근본적인 것”에서 떠나지 못했습니다. 무엇보다 나치 패망 이후 삶의 한가운데서 일어나고 있는 외상적 상실, 그러니까 늙어감이라는 “근본적인 것”에 집중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근본적인 것”에 대하여 근본적인 자세를 취하면 취할수록 아픔이 심해집니다. 그렇게 장 아메리는 아픔의 사람이었습니다.

 

아픈 사람에게 당장 좋기로는 “진통제”만한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진통제”는 그 자체로 무해해도 결국은 유해합니다. 아픔이 가닿는 “근본적인 것”을 외면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외면이 죄악이란 것을 온몸으로 깨친 장 아메리는 “진통제”를 거절합니다. 그는 “진통제” 공동체 사회 저 너머 어떤 새로운 아픔의 공동체를 꿈꾸었는지 모릅니다. 근본적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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