늙어감에 대하여 - 저항과 체념 사이에서 철학자의 돌 1
장 아메리 지음, 김희상 옮김 / 돌베개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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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의식에 직접적으로 주어지는 것은 물론이고 인간 일반이라는 보편적 문제에 지성이 등을 돌리는 시대에, 그리고 오로지 체계와 기호만을 연구 대상으로 삼는 시대에, 나는 ‘살아본 구체적 경험’le vécu만을 철두철미하게 고집했다. 나이를 먹어가는 인간이 휘말릴 수밖에 없는 상황을 근접하게나마 충실하게 그리려는 노력은 ‘성찰’이라는 방법으로만 감당할 수 있을 따름이다. 그리고 여기에 주의 깊은 관찰과 공감 능력이 덧붙여져야 한다.······

  불안했던 시절의 자기 체험을 아무 거리낌 없이 드러낼 수 있는 저자는 없다. 있는 힘을 다해 절제하려 노력하면서도 극히 개인적인 면모를 밝혀두는 이유는 그게 나 자신의 개인적 경험에 그치지 않고 역사의 일반적 교훈으로 자리 잡았으면 하는 희망에서다. 그래도 이런 개인적 면모를 밝히는 두려움은 더욱 크기만 하다. 책은 저마다 그 운명을 가질 뿐만 아니라, 또한 누군가의 운명을 정해줄 수도 있다.(6-9쪽)

 

저를 포함한 먹물 끼 있는 부류들은 책이다 하면 으레 일련번호 매겨진 두세 층위의 제목, 역시 일련번호 매겨진 각주, 불문율로 전제된 그리스 고전수사학, 기승전결이 분명하게 드러나는 구조를 떠올리기 마련입니다. 장 아메리의 『늙어감에 대하여』가 어려운 것은 이 관성을 흩뜨려놓기 때문입니다. 극단적으로 말하면 어디서 읽기를 시작해도 거기가 그냥 시작이고 어디서 읽기를 끝내도 그냥 거기가 끝입니다. 단도직입으로 이야기를 꺼내고 그 상태에서 닫습니다. 독자를 설복시키기 위한 증거 제시도 없습니다. 모든 순간 자신의 성찰을 도저하게 밀어붙일 따름입니다.

 

“대체 무슨 책이 이래?”

 

시종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A에 실어 저자는 자신의 아픈 이야기를 “있는 힘을 다해 절제하려 노력하면서” 꺼내놓습니다. 익명의 보편인간인 A의 허다한 에피소드 가운데 랜덤으로 뿌리는 방식입니다. 드러냄과 감춤 사이의 칼 날 위에서 장 아메리의 개인적 체험은 순간순간 역사가 되어갑니다. 이 책의 운명입니다. 그 운명은 전혀 예측할 수 없는 인연을 타고 흘러 이역만리 조선 땅 무명의 의자醫者 앞에 와 닿았습니다. 그 의자, 마침 이순耳順의 문턱을 넘어섰습니다. “나이를 먹어가는 인간이 휘말릴 수밖에 없는 상황”에 뼈 시린 지금 어떤 운명 지움이 일어날지 궁금합니다.

 

“대체 이 무슨 운명이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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