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증법의 낮잠 - 적대와 정치
서동진 지음 / 꾸리에 / 201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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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책 제목. 크기. 표지에 붙어 있는 저자 캐리커처. 싸가지 없다는 느낌입니다. 프롤로그를 읽는 동안 그 느낌은 계속됩니다. 제4장까지 그 느낌은 조금씩 흔들리고 찢기면서도 여전합니다. 제5장 제목에서 반전, 이후 우물쭈물. 책을 내려놓으면서 생각해 봅니다. 싸가지 없이 시작은 했는데·······아, 이건 싸가지‘조차’ 없는 거로구나.

 

여기서 제가 싸가지 없다고 한 것은 얼마 전 강준만이 낸 「싸가지 없는 진보」, 그리고 흔히 말하는 그것과는 사뭇 다른 의미를 지닙니다. 강준만의 견해에 동의하지도 않거니와 그런 싸가지론을 이 책의 저자에게 적용할 까닭은 없습니다. 우리가 흔히 똑똑은 한데 싸가지가 없다고 할 때 강준만의 뉘앙스를 배제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제가 여기서 싸가지 없다고 한 것은 글의 내용 자체에 대한 평가에 근거한 표현입니다. 좋은 글인데 예의바르지 못하다, 뭐 이런 이야기가 아닙니다.

 

확실히 저자는 글을 잘 쓰는 사람입니다. 글을 잘 쓰려면 생각이 바르게 잡혀 있고 거기에 터하여 잘 펼쳐져야 합니다. 바른 생각과 잘 된 표현 사이에 직선이 그어지는 사람의 글은 당연히 역동성을 띨 수밖에 없습니다. 역동적인 글은 기본적으로 내부 논리에 역설을 머금고 있기 때문에 자체 성찰이 가능합니다. 자체 성찰은 약도 되고 독도 됩니다. 독이 되는 경우를 일러 저는 싸가지‘조차’ 없다고 합니다. 대한민국 같은 곳에서 참으로 싸가지 없으려면 빠져나가지 못할 근거를 대고 상대가 누구든 멱살잡이로 끌어내는 단도직입의 태도가 있어야 합니다. 이에 함량미달이면서 똑똑함을 드러낼 때 저는 싸가지‘조차’ 없다고 합니다.

 

이제 앞서 암시한 대로 이 책의 마지막 제5장과 코다에 집중하여 싸가지에 대한 제 나름의 이야기를 해 볼까 합니다. 그 앞의 내용들은 때때로 대체 이 작은(!) 책에서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나 싶을 정도로 저자 하고 싶은 말을 잘, 그리고 다 한 터라 그 자체를 특별히 싸가지 이야기에 담을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마침, 또는 당연히 저자가 세월호사건 이야기를 꺼냄으로써 마무리 지었으니 임상臨床하는 저의 촉으로는 이 지점부터 팔을 걷어 부치는 게 ‘딱’이지 싶습니다. 왜냐하면 임상은 바로 눈앞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2. 가장 먼저 거론하지 않을 수 없는 문제가 있습니다. 저자는 세월호사건 명칭 문제를 그다지 고민하지 않았음에 틀림없습니다. 제5장 부제는 ‘참사’로 붙여 놓고 그 뒤는 대부분 ‘사태’로 정리하였습니다. 자연스럽게 세월호사건은 도호쿠 대지진 같은 천재지변이나 후쿠시마 원전 사태와 동일한 ‘사고’의 지위에서 다루어지고 있습니다. 저는 이 똑똑한 사회학자가 왜 명칭 문제를 이렇게 허술히 하고 넘어갔는지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앞에서 숱한 개념 문제에, 99%와 100%의 차이에 그토록 치밀하고 논쟁적인 태도를 보였던 그가 세월호사건을 도호쿠 대지진과 한 두름에 엮어 넣다니. 과실일 수 없습니다. 고의가 아닐 수 없습니다. 왜였을까요? 과연 ‘사고’ 이후, 다시 생각하는 정치와 ‘사건’ 이후, 다시 생각하는 정치가 같을 수 있다고 생각하면서 이 책의 마지막 장을 썼을까요? 정직하게 말씀드리자면 사실 이 부분에서 저는 여태까지 보여준 저자의 똑똑함이란 과연 무얼까, 심각하게 회의하게 되었습니다. 감정적으로 따지면 더 이상 읽을 필요가 없다 단정하면서도 끝내 이 저자의 싸가지 없음을 보고 싶은 일말의 기대 때문에 읽어 나아갑니다.

 

3. 저자는 제5장 첫머리에 세월호 사태를 글로 쓰는 것의 어려움, 그러니까 말해질 수 있는 것과 말해질 수 없는 것의 분할 불가능성에 관해 말하고 있습니다.

 

똑똑한 사람들은 자기주장이 분명한 부분에서는 애써 서구 석학을 레퍼런스로 인용하면서 더 어렵게 씁니다. 그 똑똑한 사람들은 또한 타당하되 자기주장을 분명히 더 집어넣지 않고 넘어가는 경우에는 그냥 어렵게 내버려둔 채 지나가버립니다. 말해질 수 있는 부분은 뭐고 말해질 수 없는 부분은 뭔데 분할 불가능하다는 것이며 분할 불가능한 것이 왜 문제라는 것인지 별반 이야기하지 않고 툭 자릅니다.

 

가령, 세월호사건은 현정권이 처음부터 기획하였다라고 쓴다면 여기서 파생되는 온갖 문제를 감당할 수 없기 때문에 특히 똑똑한 학자·대학교수는 똥마려운 강아지 꼴이 된다는 이야기인데 아무도 이것을 대놓고 말하지 못합니다. 학자·대학교수니까. 그러면 과연 누가 이런 이야기를 할 수 있을까요? 그런 식으로 따지고 보면 아무도 할 수 없습니다. 이것이 우리사회의 현실 조건입니다. 이미 이 조건에 따라 명칭의 문제, 주관성과 객관성의 문제, 원인과 이유의 문제, 그리고 정치 문제를 (얼)버무릴 구상을 하고 있으면서 길목마다 구차한 해명을 배치해 놓고 쓴 것 아닐까, 하는 강한 의구심이 듭니다. 학자·대학교수도 아닌 사람이 뭐 이런 음모론 비슷한 비난(!)이라도 가해야 똑똑한 사람들이 쓴 가면과 그 한계 근처에라도 가볼 것 아니겠습니까.

 

저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주변의 벗들은 각자 하나의 가설을 만들어내면서 기꺼이 사태를 해석하는 윤리적 능동성, 그것을 하나의 사유되어야 할 과제로서 내세우는 열정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이런 태도를 나로서는 납득하기 어려웠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나는 그것이 적잖이 퇴폐적으로 보이기까지 했다.”(189쪽)

 

아, 감이 팍 옵니다. 이 “퇴폐적”이라는 표현. 실천과 변화를 이끌어내지 못할 것이라는 사실을 뻔히 알면서 내놓고 돌아앉아 킬킬거리며 즐기는 그림. 거기다 바로 앞의 “열정”을 연결하면 대충 키치 풍경화 하나 완성입니다. 그러나 “퇴폐적” 국면을 조금 더 진지하게 전개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촛불시위’ 이후 우리는 ‘조직 없는 다중’으로서 어떤 위계와 권위적인 지침 없는 자유로운 윤리적 주체로서, 모든 사태에서 적극적으로 윤리적으로 참여하도록 독려 받아왔다. 광화문이거나 대한문 앞이거나 밀양이거나 강정마을이거나 아니면 두리반 칼국숫집이거나 마리 카페이거나 그 모든 곳에서 우리는 끊임없이 극적인 윤리적 열정을 가지고 참여할 순간들이 있다고 통지를 받는다. 그러나 그 자리에 모이는 다중은 추상적인 세계를 상대할 뿐이다. 그리고 각각의 사태는 모두 동등한 보편적 대의를 위해 헌신해야 할 무엇으로 상징화된다. 게다가 그런 사태는 너무나 많고 무엇 하나 해결되지 않은 채 다음에 오는 화려한(?) 사태에 자리를 넘겨준다. 이는 실은 너무 퇴폐적으로 보이지 않는가. 파국의 시학을 열정적으로 발언하는 철학자나 시인의 말을 들으면 나는 솔직히 우리 시대의 윤리적 데카당스를 보는 듯한 느낌이 든다.

  그러한 하나하나의 사태들은 지극히 추상적인 주관적 윤리를 요청할 뿐이다. 그것은 해결해야 할 사태의 총체 속에 등록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것은 세계를 부정하는 몸짓인 척하지만 부정으로부터 수축된 더 심하게 말하자면 부정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말해주는 행위처럼 보일 지경이 된다. 그렇게 우리는 팽목항에서 밀양으로 다시 어딘가로 희망버스를 타고 떠난 벗과 동지들에게 미안하고 착잡할 뿐이다. 어느 순간이나 ‘운동’은 너무 많고 너무 강하지만 그것은 또한 너무 적고 너무 유약하다. 세계 없는 세계에서 우리는 자신을 경악시키는 주관적인 충격의 연속으로서의 세계, 윤리적인 파국의 이미지로 전환된 세계를 가질 뿐인 상태에 이르렀다고 한다면, 이는 결코 가볍게 여길 일은 아닐 것이다.

  나는 쌍용자동차 사태를 비롯한 중요한 사태에 개입하는 담론이 “외상후증후군”과 같은 것으로 나타나는 것에 놀라곤 한다. 그것은 고통을 겪는 심리적 개인을 전면에 내세울 뿐 그들을 투쟁 속에 있던 집단적 사회적 주체 혹은 계급으로서 재현하지 못한다는 점에서 불쾌한 일이다. 그러나 그보다 더 실망스러운 것은 그것이 정치와 윤리의 관계를 왜곡한다는 점이다. 여기서 내가 말하는 정치의 윤리란 부정 혹은 투쟁을 주체화하는 것이 곧 부정/투쟁의 대상을 규정하는 것과 분리될 수 없음을 말하는 것이다. 이는 흔히 정치의 윤리화라고 말할 때의 그것과는 다른 것이다. 나는 그것을 정치의 도덕화라고 불러야 옳다고 본다. 정치를 도덕화한다는 것은 정치를 도덕적인 규범의 문제로 환원하고, 물질적이고 사회적인 관계를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세계에 어떤 책임이 있으며 어떻게 그것을 감당할 것인가로 묻는다는 것을 뜻할 것이다. 즉 그것은 세계 없는 주체의 자폐적인 반성을 가리킬 뿐이다.”(208-209쪽)

 

저자는 과연 똑똑한 학자임에 틀림없습니다. 열정과 헌신으로 사태의 현장 중심에 늘 있던 사람들, 그리고 온갖 상념 속에서 그 주위를 서성였던 사람들이 부지불식간에 빠져 들어간 함정을 정확하게 지적하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전체적 관점에서 판단할 때 과연 무비의 진실을 담고 있습니다. 이것을 인정하면서도, 아니 인정할수록 어떤 의문이 깊어집니다.

 

“광화문에도 대한문 앞에도 밀양에도 강정마을에도 두리반 칼국숫집에도 마리 카페에도 팽목항에도 예외 없이 가로놓여 있던 이 윤리적 데카당스, 자폐적 반성의 문제를 풀기 위해 이 문제를 정확히 알고 있었던 저자는 과연 그 긴 세월 동안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매우 진부하고 통속함에도 이 질문은 매우 현실적이고 절박한 것입니다. 거기 매달린 모든 사람들이 몰라서 퇴폐·자폐일로의 길을 갔다면 알고 있었던 저자는 무슨 노력을 했을까요? 저자 한 사람만이 아는 사실이 아니라 사회학자들에게 공유된 지식이라면 이 집단은 무슨 일을 했을까요? 아니, 그가, 그들이 과연 무엇인가 했더라면 일이 이렇게 되었을까요?

 

질문을 조금 더 구체적으로 해보겠습니다. 저자는 “파국의 시학을 열정적으로 발언하는 철학자나 시인의 말”을 들었다고 했습니다. 그게 누구일까요? 특히 철학자 가운데 누가 그런 말을 했을까요? 시인이라면 송경동을 말하는 것일까요? 대체 어디서 누가 한 말을 듣고 윤리적 데카당스를 느꼈다는 것인지 궁금하기 짝이 없습니다.

 

저자는 “쌍용자동차 사태를 비롯한 중요한 사태에 개입하는 담론이 “외상후증후군”과 같은 것으로 나타나는 것에 놀라곤 한다.”고 했습니다. (외상후증후군이 사회학 용어로 존재하지 않다면 이 용어는 의학에서 원용하였을 텐데 정확한 표현이 아닙니다. 이 또한 문제이긴 하나 여기서는 생략하겠습니다.) 쌍용자동차 사태를 비롯한 중요한 사태에 개입하는 담론이 대체 무엇을 뜻하는지 짐작은 갑니다. 아마도 저자는 쌍용자동차 사태 이후 형성된 정혜신이나 몇몇 이른바 ‘소셜테이너’, 그리고 공지영 작가 등이 일으킨 일련의 치유 담론에 인상을 받은 것 같습니다. 26명이나 죽었고 수많은 당사자와 가족이 정신장애에 시달리고 있는 상황에서 이런 담론과 실천이 주목을 받거나 심지어 주도적 분위기를 생산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문제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이들이 이렇게 자기 영역에서 자기 담론을 만들어가는 동안 사회학자로서 사회적 반향 일으키는 글 하나도 써내지 못하고 있다가 이제 와서 “자폐적인 반성” 운운이라니. 자신이 만들어야 할 담론을 만들지 않아서 일어난 결과를 남이 만든 다른 담론 탓으로 돌리는 것은 싸가지 이전의 문제입니다.

 

제5장의 마무리는 정당하게도 이렇습니다.

 

자유의 대가로서 세계의 무의미함을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그 자유를, 세계의 원인cause을 확정하고 그것을 지배하는 자유로 끌어올릴 수 있을까. 그것은·······대의cause를 구축하는 것, 그리고 이를 통해 자신을 정치적으로 주체화하는 것이·······다.·······새로운 대립의 배치를 만들어냄으로써 세계를 존재론적으로 전환하면서 동시에 주관화하(-인용자)면, 우리는 세월호 사태란 없다고 기꺼이 말해야한다. 이것이 어떻게 원인과 연결되어 있는지 물어보도록 하는 기회가 아니라 원인과 대면하는 것을 회피하도록 한다면, 즉 자본주의적 적대와의 대면을 회피하도록 하는 구실이 된다면, 우리는 고작 비극 없는 멜로드라마의 세계에서 배회하고 말 것이다.(214-215쪽)

 

결국, 원인의 문제이며 적대의 문제이며 정치의 문제입니다. 이렇게 풀 문제인 한, 기꺼이 세월호 사태란 없다, 가 맞습니다. 그러나 저자가 비판하는 것처럼 이것은 조직 없는 다중이 빚어내는 윤리적 데카당스 때문이 아닙니다. 정치를 도덕화한 사람들이 행하는 자폐적 반성 때문이 아닙니다. 그들은 그들의 최선을 다했습니다. 원인의 문제이며 적대의 문제이며 정치의 문제임을 간파하면서도 아무 짓도 하지 않은 저자와 같은 부류의 사람들 때문입니다. 이들이 몸으로 말하는 그 순간까지 우리사회는 원인에 다다가지 못합니다. 이들이 몸으로 말하는 그 순간까지 우리사회에 적대는 형성되지 않습니다. 이들이 몸으로 말하는 그 순간까지 우리사회에는 정치가 없습니다.

 

4. 드디어 코다coda. 어찌되었든 이 마무리 말을 하기 위해 여태까지 달려온 셈입니다. 여기서 무슨 말을 하느냐, 가 이 책을 통한 저자의 진면모를 결정할 것입니다. 단도직입으로 그 마지막 일곱 문장을 읽겠습니다.

 

서로를 배척하는 두 가지의 시선을 조정할 수 있는 방편은 없다. 최선이거나 최악일 수밖에 없는, 서로 전연 다르게 현상하는 것처럼 보이는 세계를 보는 관점을 통합하는 방편을 찾으려면 그것을 발명하는 수밖에 없다. 그러한 관점은 저절로 나타나지 않는다. 그것은 오늘날 가장 무관심한 것으로 전락한 정치를 되살려 냄으로써만 얻을 수 있다. 지금까지 나는 그런 변증법의 가능성을 정치에서 발견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하고자 했다. 내게 있어 정치란 그런 변증법적 부정의 다른 이름이다. 모쪼록 그것이 글을 읽은 이들에게 전해지길 바랄 뿐이다.”(230-231쪽)

 

그렇습니다. 경제 스스로가 움직이기 위해 언제나 의지해야 하는 표면인 정치, 경제에 의해 두 제곱되는 정치, 경제와 절대 대응하지 않고 항상 어긋나기 때문에 정치화하는 운동이 필요한 바로 그 정치를 되살려 냄으로써만 변증법적 부정은 가능합니다. 지극히 타당합니다. 지극한 타당함 때문에 비어 있습니다. 똑똑한 학자들의 종말입니다. 이 똑똑한 학자는 “발명하는 수밖에 없다.”는 미래의 과제를 마치 옆집 대추나무에 걸린 연 보듯 보면서 표표히 떠납니다. “모쪼록 그것이 글을 읽은 이들에게 전해지길 바랄 뿐이다.”를 던져놓고.

 

저자가 30대, 아니 40대 초반의 젊은 학자라면 이 결론에, 그래, 그럴 수 있지, 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저자는 오십 줄에 들어선 중견학자가 아니던가요. 자기 자신이 무엇을 했는지, 하고 있는지, 하고자 하는지를 밝히지 않는 글을 언제까지 쓰려 하는지 안타깝습니다. 우리사회 지식인들의 이런 ‘성장지체적’ 태도가 비롯하는 연유를 생각해봅니다.

 

느낌의 공동체니 기억, 애도의 공동체니 하는 말들은 우리 시대의 윤리-정치적 유행어구들일 것이다. 그런 몸짓은 ‘세계 없는’ 주체의 편에서 이뤄지는 낭만적인 부정을 가리킨다. 그리고 그것은 현실적 부정을 회피한다.·······

  그러므로 애도와 기억, 느낌 등의 아름다운 개념으로 조직된 공동체는 부정의 정치를 조직하는 힘을 갖지 못한다. 부정이란 나를 괴롭히고 힘들게 만드는 세계를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세계가 왜 나에게 그러한 방식으로 나타나는지를 반성하는 것이다.·······즉 세상이 그렇게 굴러갔던 것은 내가 세계를 그런 식으로 응시했던 탓이라는 것을 깨닫는 것이다.·······스스로를 바꾸어야 한다. 모순적으로 사고한다는 것은 바로 그런 것이다.·······자신을 자유로운 주체로서 만들어내지 못하도록 만드는 힘을 원망하고 한탄하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하도록 만드는 세계를 탐색하고 추궁하는 것이다.”(225-227쪽)

 

애도와 기억, 느낌 등의 아름다운 개념으로 조직된 공동체”, 저자는 끝내 이 나긋나긋하고 만만한, 그러면서도 끊임없이 열등감을 촉발시키는 ‘희생양’에 대한 칼질을 포기하지 못합니다. 앞서 말씀드린 것에 문학평론가 신형철의 책이름을 곧바로 떠올리게 하는 느낌의 공동체를 추가함으로써 저자는 거대한 낭만적 부정 공동체를 ‘발명’하였습니다. (아마도 이 발명에 심혈을 기울이느라 “관점을 통합하는 방편”을 아직 ‘발명’하지 못한 모양입니다.) 이 공동체는 한심하게도 현실적 부정을 회피할 뿐만 아니라 나를 괴롭히고 힘들게 만드는 세계를 거부하며, 그 힘을 원망하고 한탄하는 부류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들에게 저자는 훈계를 아끼지 않습니다.

 

세계가 왜 나에게 그러한 방식으로 나타나는지를 반성하”라. “세상이 그렇게 굴러갔던 것은 내가 세계를 그런 식으로 응시했던 탓이라는 것을 깨”달으라. “스스로를 바꾸”라. “그렇게 하도록 만드는 세계를 탐색하고 추궁하”라.

 

세월호사건의 다양한 피해자군에 대한 심리치료는 물론 지역적·사회적 치유 전반을 실천하는 공동체 ‘이웃’을 이끌고 있는 정신과 전문의 정혜신과 저는 개인적으로 약간의 인연이 있습니다. 쌍용자동차 해고노동자와 가족 치료 때 그의 옆에서 아주 작은 일로 제가 함께 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비록 기본적인 것이기는 하지만 그의 사회·정치적 견해도 어느 만큼은 인지하고 있습니다. 적어도 그에 관한 한 저자의 이런 비판과 훈계는 형식적인 무례 이전에 내용적 무지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는 세월호사건 피해자에 대해 ‘외상증후군’ 운운하는 것 자체를 반대합니다. 정치적 치유를 정면으로 거론합니다.

 

무엇보다 저는 외상후증후군, 애도, 기억, 느낌이라는 말을 중심으로 일련의 의학적 언급을 하면서 그것들을 싸잡아 ‘낭만적이고 아름다운 개념’의 문제로 폄하하는 저자의 무지를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애도가, 기억이, 느낌이 어떤 의미에서 그에게 낭만적인지, 아름다운지 모르지만 당사자나 치유자의 처지에서는 결코 낭만적이지도 아름답지도 않습니다. 반성, 깨달음, 그리고 탐색과 추궁 없는 애도, 기억, 느낌은 없습니다. 성소수자 운동을 한다는 똑똑한 사회학자의 손에서 이런 마초적 글이 흘러나왔다는 사실을 대체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는지.

 

5. 글 앞부분에서 말씀드렸듯 저자는 똑똑한 사회학자입니다. 모순된 세상에서 모순된, 그러니까 유물론적 또는 변증법적 사유를 해야 한다는 사실을 끝까지 놓치지 않는 자성적 지혜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 자성적 지혜가 바깥을 향해서는 빗장이 질러져 있는 것이라면 어떨까요. 말과 행동 사이, 생각과 실천 사이, 총론과 각론 사이에 제대로 된 소통이 가능하지 않을 것입니다. 빠져나가지 못할 근거를 대고 상대가 누구든 멱살잡이로 끌어내는 단도직입의 태도를 지닐 수 없게 될 것입니다. 스스로에게 독이 되어 돌아올 것입니다. 세월호 사태 아닌 사건 앞에서 이 정도면 가히 싸가지‘조차’ 없는 셈이 아닙니까. 모쪼록 그것이 저자에게 전해지길 바랄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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