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 - 의학적 철학적 치유적 관점에서 본 고통
한스 게오르크 가다머 지음, 공병혜 옮김 / 철학과현실사 / 2005년 10월
평점 :
품절


 

1. 한스 게오르그 가다머는 제 젊은 시절의 열정 한 자락을 거머쥐고 있었던 해석학의 거장입니다. 까마득한 시간이 흐른 어느 날 그가 고통에 관한 이야기를 남겼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더불어 그가 오랜 세월 동안 극도의 통증에 시달리며 살아왔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습니다. 추정컨대 그의 해석학은 아마도 이런 그의 삶과 결코 무관하지 않을 것입니다.

 

2. 그가 100세 되던 2000년 통증에 관한 강연을 한 내용을 토대로 작은 책이 나왔는데 그것이 바로 「고통」입니다. 의자醫者로서 극진한 마음이 생기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제목과 독일어 원어를 대조하는 순간, 아, 이거 무언가 길을 잘못 들고 있는 책이로구나, 싶었습니다. ‘고통’이라 번역한 Schmerz는 넓은 의미에서 보면 고통이나 고뇌로 번역할 수 있지만 책의 전반을 흐르는 논지를 감안하면 ‘아픔(통증)’이라 번역해야 맞습니다. 적어도 독일어에 그 맞은편 짝, 그러니까 psychischer Schmerz로서 Leid가 있는 한 이런 번역은 그 자체로 논점을 모호하게 만들어버립니다.

 

3. 우리가 흔히 쓰는 고통은 엄밀히 보면 괴로움(苦)과 아픔(痛)의 합성어입니다. 이런 이분법이 마뜩치는 않으나 구태에 선을 긋는다면 아픔은 육체적인 것이고 괴로움은 정신적·심리적인 것입니다. 이 책은 고든 통이든 화학합성약물을 투여하여 신속하게 없애려 드는 것이 과연 바른 의학적 자세냐, 하는 문제를 주된 관심사로 다룹니다. 하지만 감춰진 논점이 하나 있고 실은 그게 더 근본적입니다. 이 문제는 문맥상 자연스럽게 드러나기를 기다리도록 하겠습니다.

 

4. 우선 이 문제에 제대로 접근하려면 고통의 의학적 본질이 과연 무엇인가에 대한 치밀하고 근본적인 논의가 필요합니다. 서구의학도 가다머도 이 부분에서 자신의 전통에서 오는 한계를 넘어서지 못하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가다머는 의학자가 아니기 때문에 서구의학의 패러다임이 지니고 있는 근본적 약점 자체를 지적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서구의학의 패러다임이 지니고 있는 근본적 약점은 무엇일까요? 고통과 관련해 단도직입으로 말씀드리면 고통으로 나타나는 증상을 그대로 병이라고 인식하고 그렇기 때문에 무조건 빨리 없애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는 실로 얼토당토않은 무지의 소산입니다. 증상, 특히 고통 가운데 아주 많은 것들은 그 자체로 병이 아니라 자연치유반응입니다. 스스로 치유하려는 노력을 병으로 매도하여 ‘잡으려’ 덤벼드는 것이 서구의학의 어리석음입니다. 진통제와 증상억제제를 치료제라 철석같이 믿는 ‘신앙’은 바로 이런 어처구니없는 오류에서 비롯하였습니다. 이런 패러다임을 바로잡지 않는 한 서구의학은 더 이상 발전할 수 없습니다. 실제로 어떤 의학 연구가는 서구의학은 1975년 이후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다고 지적하였습니다.

 

고통은 물론 대단히 불편합니다. 불편하면 없애고 싶은 것이 인지상정입니다. 그러나 그 불편함을 통과해야만 병이 낫는다면 불편함을 제거 대상으로 삼아서는 안 됩니다. 고통이, 불편함이 인생 전체에 무슨 의미가 있느냐, 어떤 메시지를 주느냐, 이런 거창한 이야기까지 갈 것도 없습니다. 병을 스스로 낫게 하려는 노력이라면, 만일 그 자연치유반응만으로 모자란다면 그것을 도와주는 것이 의학이지 어떻게 그것을 제거하는 것이 의학일 것입니까.

 

감기를 예로 들겠습니다. 열이 오르고 두통이 있다 하면 내과 양의사는 진리에 입각한 것인 양 해열진통제를 처방합니다. 그러나 여기서도 발열·두통은 자연치유반응입니다. 따라서 한의사들이 처방하는 갈근탕 같은 한약들은 오히려 열을 조금 더 올려준 뒤 스스로 알아서 떨어지게 해줍니다. 자연치유력을 북돋아주는 것입니다. 해열진통제는 궁극적으로 체열관리 시스템을 망가뜨리고 갈근탕은 궁극적으로 체열관리 시스템을 강화해줍니다. 자명하지 않습니까.

 

우울장애를 예로 들겠습니다. 슬픔에 휘감기고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없다 하면 정신과 양의사는 진리에 입각한 것인 양 항우울제를 처방합니다. 그러나 여기서도 슬픔·허무감은 자연치유반응입니다. 따라서 저는 그 감정을 있는 그대로 받아주고 스스로 접힌 기억을 펼쳐 풀어내게 합니다. 자연치유력을 북돋아주는 것입니다. 항우울제는 궁극적으로 감정관리 시스템을 망가뜨리고 자기 수용적 상담은 궁극적으로 감정관리 시스템을 강화해줍니다. 자명하지 않습니까.

 

고통은 원칙적으로 적군이 아니고 아군입니다. 이 근본적인 사실을 모르기 때문에 이 책에서 가다머가 힘주어 말한 것도 그 반대편에서 질문한 사람이 “환상적”이라고 비판한 것도 도저함에 이르지 못하는 것입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아무리 되풀이해 읽어도 이 책은 모호한 내용으로 일관하고 있습니다. 번역자가 첨부한 말미의 자기 논문도 여전히 모호하고 원칙론적 이야기를 하고 있을 뿐입니다.

 

5. 이제 고통이라는 말 속에 담겨 있는 언어 관습적 측면을 조금 더 면밀히 살펴보겠습니다. 무엇보다 통고痛苦라는 말이 없지는 않으나 고통이란 용어가 일반화된 것이 논의의 단서이자 근거가 됩니다. 두 가지 가능성이 있습니다.

 

단순 합성어라면 통痛보다 고苦가 앞선 것으로 보아 고를 중시하거나 더욱 문제라고 판단하는 인식의 반영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심신心身이란 말의 순서와 정확히 일치합니다. 한자말의 단어는 거의 예외 없이 남성과 정신의 가치 우위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이런 경향은 심지어 불교 사상의 번역·전승 과정에도 나타납니다. 삼특상三特相으로 알려진 무상·고·무아無常·苦·無我의 고苦가 그 대표적인 예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여기 고苦가 붓다의 원음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경전으로 만드는 과정에서 후인들이 그렇게 바꾸었거나, 중국어 번역 과정에서 그리 되었거나 둘 중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만일 붓다의 원음이라면 이는 붓다 사상 자체의 한계일 것입니다. 말하자면 통痛이 아닌 고苦를 일차적·근본적 범주로 삼음으로써 세계의 실상을 이해하는 방식이 관념성으로 기울었다는 것입니다. 적어도 현실 불교의 위상과 행태를 보면 이런 면모가 여실히 드러나고 있습니다. 이를 돌이키거나 바꾸지 않는 한 불교는 영원히 구름 위를 떠도는 거대담론에 머무를 것입니다.

 

단순 합성어가 아닐 경우 가장 자연스러운 어의는 괴로운 아픔이니, 곧 ‘통증은 괴로운 것이다.’ 라는 생각이 반영되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통증에 대한 부정적 판단은 ‘통증은 무조건 없애야 한다.’는 실천으로 나아가게 합니다. 이것은 고통이란 한자 어휘의 문제를 떠나 인류가 과학이랍시고 만든 주류의학이 대증요법으로 통증을 억제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진실로 확산됩니다. 특히 서구의학은 진통제일주의 의학입니다. 정신조차 뇌로 환원하여 정신적 장애에도 진통제적 성격을 지닌 증상억제제를 투여합니다.

 

의학의 진통제를 물리적 토대로 한 이런 사조는 다른 방면에도 광범위한 영향을 끼쳤습니다. 무엇보다 이른바 긍정주의 심리학에는 치명적인 감염을 일으켰습니다. 통증을 없애는 길이 통증이라는 부정적인 것을 없다고 믿는(!) 긍정 마인드에 있다고 설파함으로써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사람을 도리어 절망의 나락으로 내몰았습니다. SLE(전신성홍반성낭창)에 걸려 수많은 통증에 시달렸으나 그 해법을 긍정주의에서 찾다가 결국은 견디지 못하고 스스로 목숨을 거둔 ㅊ씨의 비극이 그 대표적인 예입니다.

 

6. 바야흐로 고통을 직시할 때가 왔습니다. 고통은 많은 경우, 아니 본질적으로 병이 아닙니다. 자연치유반응입니다. 무조건 없애려 하는 것은 의학이 아닙니다. 고통을 없애려면 고통을 북돋아주어야 한다는 역설을 모르는 한 의학은 반생명적 살인기술일 뿐입니다. 고통을 북돋우는 과정에서는 불편함을 견디는 전인격적 감응response 문제가 개입합니다. 전인격적 감응은 결코 관념의 문제가 아닙니다. 관념을 넘어서 실재의 세계로 가려면 몸의 아픔, 그러니까 통증의 위상을 바로 알아야 합니다. 통증은 일차적·근본적·범주적입니다. 무통의 전략과 편의의 전술로 승승장구하는 자본의 의학에 맞서 몸의 아픔을 화두로 들어야 합니다. 그게 괴로움의 함정을 벗어나는 바른 마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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