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라앉은 자와 구조된 자 - 아우슈비츠 생존 작가 프리모 레비가 인생 최후에 남긴 유서
프리모 레비 지음, 이소영 옮김 / 돌베개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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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제 세 번째 형태의 질문에 이르렀다. 국경이 폐쇄되기 전에, 덫이 철컥 물기 전에, 사전에도망가지 않았나? 라는 질문이다.·······(196)

  일이 다 벌어진 뒤의 뒤늦은 깨달음과 고정관념들을 경계해야 한다.·······위협에 직면한 인간은 준비를 하고, 저항하거나 달아난다. 그러나 당시의 많은 위협들이 오늘날 우리에게는 분명하게 보이지만, 그 당시에는 자발적 불신과 정신적 억압, 위안을 주는 진실·······의 베일에 가려져 있었다.

  ·······우리는 얼마나 확실한 삶을 살고 있는가?·······

  ·······오늘날의 두려움은 당시의 두려움보다 덜 혹은 더 근거 있는 것인가?·······왜 우리는·······‘사전에도망가지 않는가?(201-203)

 

비선실세논란의 당사자인 한 인사가 지난번 의문의 7시간알리바이를 대는 과정에서 그 때 역술인과 함께 있었다고 진술한 것은 참으로 의미심장합니다. 사실 어디 그 인사뿐이겠습니까. 이 나라 권력과 재력의 최정상에 서 있는 사람들이 역술인의 점괘에 의존해 중대한 일을 결정한다는 것은 이미 공공연하게 알려진 사실입니다. 고작-, 이 표현은 역술인 자체를 향한 폄사貶辭가 아님을 밝혀둡니다-점괘 하나에 국가와 거대 기업의 운명이 좌우된다니 참 익숙하고도 기이한 일입니다. 어찌 보면 웃픈일이지만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인간의 한계를 적나라하게 드러내주는 서늘한 진실입니다.

 

미래에 일어날 일만 제대로 알려준다면 아니 할 말로 그것이 사주풀이든 공수든 괘념할 일은 아닙니다. 문제는 과연 그것들이 제대로 미래사를 알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꽤 오래 전 어느 유명한 역술인의 간청(!)으로 그와 마주앉은 일이 있습니다. 제 앞에서 분명히 접신spirit possession 상태로 들어갔지만 그는 도무지 입을 열지 못했습니다. 신당으로 다시 들어가 20여분 동안 의식을 행하고 나온 뒤에도 공수는 내려지지 않았습니다. 접신 상태를 푼 다음 그가 정직하게 말했습니다.

 

선생님 앞에서는 입이 떨어지지 않습니다. 할아버지께서 알아 뵐 수 없다고 하십니다.”

 

아마 그 할아버지란 그 역술인의 수호신장’(몸주)일 것입니다. 그 몸주의 수준, 그러니까 영적 위계로는 감히제 영적 시공 속으로 접근할 수 없다는 고백이었습니다. 동서고금의 버림받은 억조의 영혼을 모두 모시고 살아서 그럴 것이라 웃으며 말해주니 과연 두려운 분이 라며 낯빛을 바꾸었습니다. 보편적 진실에 부합하든 아니든 이 일로 말미암아 저는 미래에 대한 궁금증과 충족이 대개 어떤 차원에서 진행되는지 깨닫게 되었습니다.

 

우리의 일상사에서 무슨 일이든, 앞두고 있거나 겪고 있을 때는 그 일에 묶여 흘러가기 때문에 시간을 꿰뚫는 통찰이 불가능합니다. 다 겪고 나야 비로소 아, 그랬구나! 하는 뒤늦은 깨달음이 옵니다. 이 깨달음은 사후적으로 구성된 단단한 논리를 가지게 됩니다. 이 사후논리가 자기 자신에게는 후회를 끌어들입니다. 타인에게는 훈계의 근거로 작용합니다. 둘 다 건강하지 않습니다. 이런 결과가 초래되고 아무리 반복해도 잘 개선되지 않습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날까요? 단도직입으로 말하자면 시간의 흐름을 사후에 인과적·선형적으로 재구성했기 때문입니다. 시간을 인과적·선형적으로 재구성하면 그 시간은 일종의 공간으로 변합니다. 공간으로 변한 시간은 통제와 복제가 가능해집니다. 여기에 권력이 개입합니다. 아니 본디 권력이 바로 이 음모를 꾸미고 공작을 진행합니다. 개인의 후회를 사회화하고 사적인 훈계를 국가화합니다. 후회하는 대중을 국가가 정치와 법의 이름으로 훈계함으로써 대중의 삶은 개선되지 않고 극소수 지배집단의 이익만 극대화되는 것입니다.

 

사후 논리에 입각한 질문-왜 사전에 준비하지 않았는가? 왜 사전에 도망가지 않았는가?-은 의문문의 형태를 띤 비난과 공격의 평서문입니다. 아니, 이렇게 된 것은 너희들의 잘못 때문이므로 앞으로도 쭉 이렇게 가라는 명령문입니다.

 

참으로 무서운 일이 아닙니까. 우리가 이렇게 사후 논리에 속수무책으로 당하는 것은 유한한 존재인 인간의 무지가 필연적으로 빚어내는 알 수 없는 일에 대한 궁금증이 탐욕·공포(불안)와 뒤엉켜 손쉬운 해법을 찾기 때문입니다. 알 수 없는 일 앞에서 점괘를 구하는 것은 급하다고 고리의 사채를 끌어다 쓰는 것과 같습니다. 내 힘이 부족하다고 깡패를 사서 형제를 제압하는 것과 같습니다.

 

어차피 어떻게 수를 쓰더라도 알 수 없습니다. 모르기 때문에 살아가는 것입니다. 큰 이치를 깨달았다는 것이 한치 앞을 모른다는 것까지 포함한 것이 아니라면 이는 결코 깨달음이 아닙니다. 모른다는 것을 공포(불안)의 대상으로 삼고, 안다는 것을 탐욕의 대상으로 삼는 한 악무한에 갇힐 뿐입니다. 모름을 활짝 열어둔다면, 앎을 짐짓 닫아둔다면 점괘의 노예가 되지도, 사후 논리의 포로가 되지도 않을 것입니다.

 

속절없이 오늘은 사라지고 있습니다. 가뭇없이 진실의 증거들은 사라지고 있습니다. 그럴수록 알 수 없는 내일이 엄습해옵니다 두려움을 뚫고 나아가야 합니다. 탐욕을 내려놓고 손을 잡아야 합니다. 사전에도망가지 못하는 것은 269번째 2014416일을 살고 있는 우리의 천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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