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라앉은 자와 구조된 자 - 아우슈비츠 생존 작가 프리모 레비가 인생 최후에 남긴 유서
프리모 레비 지음, 이소영 옮김 / 돌베개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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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감금과 탈출의 결합과 마찬가지로 억압과 반란의 결합 역시 하나의 고정관념이다.······반란의 역사, 그러니까 ‘소수의 권력자’에 대항하는 ‘억압받는 다수’의 아래로부터의 봉기는 인류의 역사만큼이나 오래되었고, 또 그만큼 다양하고 비극적이다.·······어떤 경우든 간에 가장 억압받는 개인들은 운동의 선봉에는 결코 서지 않는다는 사실을 볼 수 있다. 오히려 보통은 대담하고 편협하지 않으며 개인적으로는 안정적이고 평온하며, 심지어 특권을 누릴 수도 있는 삶을 살 가능성이 있음에도 관대함·······으로 투쟁에 투신하는 지도자들이 혁명을 이끈다. 기념물에서 자주 되풀이되는, 자신의 무거운 사슬을 끊는 노예의 상像은 수사적인 것이다. 그의 사슬은 좀 더 가볍고 느슨한 구속에 메인 동료들에 의해 끊어진다.

  ·······모든 진정한 봉기들·······의 원동력인 분노와 의분을 불러일으키기 위해서는 물론 억압이 존재해야 하지만, 적당한 정도이거나 비효율적으로 행해져야 한다. 라거에서의 억압은 극단적 수준의 것이었고·······포로는 고갈의 한계에 와 있었다. 굶주리고 쇠약하며 상처로 가득했고·······해진 넝마 같은 인간이었다.·······현실세계에서 혁명은 넝마들로는 되지 않는다.(194-196쪽)

 

에베레스트 등정 과정에서 조난당해 동사한 경우 벌거벗은 시신이 있다 합니다. 극한의 추위를 도리어 더위로 인지하는 방어 '오작동'이 일어나기 때문이라는 설명을 듣고 잠시 먹먹해졌던 기억이 납니다. 마음병 치유를 하다보면 본질상 이와 동일한 현상을 만나게 됩니다. 마음의 고통이 극한에 달할 경우 그것을 쾌락으로 전도시키는 병리적 방어 적응입니다. 이를 “고통체”라 이름 하는 사람들도 더러 있습니다.

 

고통이 극에 달할수록 그 고통에 격렬하게 저항할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이는 인간에 대한 과대하거나 안이한 평가의 소산일 따름입니다. 이유도 의미도 모른 채 더해만 가는 고통을 끝없이 감내해야 한다는 당위의 근거도 모호하지만 극한에 이르면 마침내 저항하고야 말 것이라는 기대의 근거는 더더욱 모호합니다. 이 모호함의 틈새로 당위보다 먼저 절망이, 기대를 뒤엎으며 무기력이 들이닥치는 것이 인간 현실입니다.

 

우울증에 대한 ‘바깥사람들’의 경박한 인식을 예로 들어 보겠습니다. 한 여고생이 엄마한테 우울증이라고 말하자 이렇게 일갈했다고 합니다.

 

“이년아, 네가 우울증이면 엄마는 벌써 자살했겠다!”

 

이 반응의 핵심은 물론 딸의 우울증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이지만 그냥 지나칠 수 없는 또 하나의 심각한 문제를 품고 있습니다. 우울증의 극한에 자살이 있다는 바로 그 오해 말입니다.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일이니 가히 그럴만하다 싶지만 죽을 마음조차 일으키지 못하는 깊은 어둠이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하는 ‘바깥’ 소리일 뿐입니다.

 

죽음이 두려워서가 아니라 죽음이란 관념 자체가 아득해서 생각조차 형성되지 않는 우울증 환자가 있습니다. 죽을 마음 일으키는 것도 에너지인데 손끝 하나 까딱할 수 없는 우울증 환자가 있습니다. 이승과 저승 사이에 망연히 널브러져 있는 우울증 환자가 있습니다. 그는 살아 있으나 ‘이미’ 죽은 사람입니다. 이미 죽은 사람이 무슨 죽음을 어떤 힘으로 택할 것입니까. 자살이란 산 사람이 스스로 죽음의 강을 건너는 것 아니던가요.

 

적어도 이 자발성에 관한 한 자살은 저항이며 반란이며 혁명입니다. 저항이, 반란이, 혁명이 불가능한 상황을 프리모 레비는 이렇게 묘사합니다.

 

억압은 극단적 수준의 것이었고·······포로는 고갈의 한계에 와 있었다. 굶주리고 쇠약하며 상처로 가득했고·······해진 넝마 같은 인간이었다.·······현실세계에서 혁명은 넝마들로는 되지 않는다.

 

넝마”! 이보다 신랄한 표현은 다시없을 것입니다. 아뿔싸! 넝마에게 반란을 질문하다니. 이 질문은 그러므로 질문자에게 되돌아가야 합니다. 프리모 레비는 이렇게 말합니다.

 

어떤 경우든 간에 가장 억압받는 개인들은 운동의 선봉에는 결코 서지 않는다는 사실을 볼 수 있다. 오히려 보통은 대담하고 편협하지 않으며 개인적으로는 안정적이고 평온하며, 심지어 특권을 누릴 수도 있는 삶을 살 가능성이 있음에도 관대함·······으로 투쟁에 투신하는 지도자들이 혁명을 이끈다. 기념물에서 자주 되풀이되는, 자신의 무거운 사슬을 끊는 노예의 상像은 수사적인 것이다. 그의 사슬은 좀 더 가볍고 느슨한 구속에 메인 동료들에 의해 끊어진다.

 

그렇습니다. 답은 자명해졌습니다. 저항의, 반란의, 혁명의 주체가 누구인지. 누가 넝마의 발목에 채워진 사슬을 끊어야 하는지. 이들이 침묵하고 있습니다. 아니. 아닙니다. 오히려 아래를 내려다보면서 이렇게 비아냥거리고 있습니다.

 

“너희들이 아직도 고생을 덜했구나!”

 

이들이 바로 저, 그리고 그대가 아닐는지요. 대담하지 못한가요. 편협한가요. 안정적이고 평온하지 못한가요. 관대하지 못한가요. 그러면, 그렇다면, 대체 어찌해야 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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