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라앉은 자와 구조된 자 - 아우슈비츠 생존 작가 프리모 레비가 인생 최후에 남긴 유서
프리모 레비 지음, 이소영 옮김 / 돌베개 / 2014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불가지론자가 아닌 사람들, 어떤 믿음이든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 권력의 유혹에 더 잘 저항했다.·······

  아메리처럼 나도 믿음이 없는 사람으로 라거에 들어왔다. 믿음이 없는 사람으로 해방을 맞았고 지금까지 살아왔다. 오히려 라거의 경험이, 그 무시무시한 부당함이 내 불신을 한층 더 굳혔다.·······그럼에도 나는 굴복하고 싶은 유혹, 기도에서 피난처를 찾고 싶은 유혹을 느낌 적이 있었음을·······시인해야겠다. 그 일은 1944년 10월, 임박한 죽음을 선명하게 인식하게 되었던 유일한 순간에 일어났다.·······한 순간 나는 도움과 피난처를 구할 필요성을 느꼈다. 그러고 나서는 불안함에도 불구하고 평정을 되찾았다. 경기의 끝에 가서 경기의 규칙을 바꾸지는 않는 법이다. 그것이 비록 지고 있는 경기일지라도.·······나는 그 유혹을 지웠다.·······

  가스실 선발이나 공중 폭격 같은 결정적 순간들에서뿐만 아니라, 고된 일상 속에서도 믿음이 있는 사람들이 더 잘 살았다. 아메리와 나, 우리 둘 다 그것을 알아차렸다. 종교적 믿음이든 정치적 믿음이든·······그들의 우주는 우리의 우주보다 더 방대하고, 시간과 공간 속에 더 확장되어 있었으며, 무엇보다도 이해할 수 있는 것이었다.·······그들 마음속의 고통이나 그들 주위의 고통은 해석 가능한 것이었고, 따라서 절망으로 넘어가지 않았다.·······그들 중 일부는·······우리를 전도하려 노력했다. 그러나 어떻게 믿음이 없는 사람이 ‘시의적절한’ 믿음을 단지 시의적절하다는 이유로 그 자리에서 받아들이거나 만들어낼 수 있단 말인가?(176-178쪽)

 

제법 오래 전 이야기입니다. 강남의 그 뜨르르한 대형교회 권사 한 분이 잠이 도통 오지 않는다며 한의원에 오셨습니다. 자세한 진단 결과 그 불면 현상은 우울증에서 비롯한 것이었습니다. 그 의학적 진실을 말씀드리자 그 분은 버럭 화를 내셨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한테 우울증이 가당키나 한 말입니까?”

 

저는 예의를 갖추어 그러나 단호히 말씀드렸습니다.

 

“신앙의 논리로 의학적 진단을 인정하지 않으신다면 치료할 수 없습니다.”

 

물론 그 분은 발을 탕탕 구르시면서 한의원을 떠나셨습니다. 아마 기독교 신앙을 지닌 분들 가운데 이 권사님 의견에 동의하실 분이 적지 않을 것입니다. 어찌 생각하십니까?

 

순서가 반대인 경우도 있습니다. 우울증 치료를 위해 기독교 신앙에 의지하면 어떻겠는가 하는 질문을 드물지 않게 받습니다. 독이 될 수도 있고 약이 될 수도 있다 하면 어떻게 독이 될 수 있느냐고 항의합니다. 어찌 생각하십니까?

 

기독교인도 우울증에 걸릴 수 있습니다. 실제로 수많은 기독교인 우울증 환우와 상담한 경험이 있습니다. 그것도 핵심적인 위치에 있는 사람들 말입니다. 콕 찔러 한 부류를 지적한다면 목회자 부인들입니다. 이들이 신앙이 잘못되어 우울증에 걸린 것입니까. 이들이 신앙이 모자라 우울증을 신앙의 힘으로 고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까. 만일 정말로 이들이 잘못된 신앙으로 우울증에 걸리고 신앙이 모자라 우울증을 고치지 못하고 있다면 그 잘못되고 모자란 신앙이란 대체 어떤 신앙일까요. 그 신앙이 지금 대부분의 기독교인의 바로 그 신앙 아닌가요.

 

이 지점에서 우리는 프리모 레비의 말에 주의를 기울여볼 필요가 있습니다.

 

가스실 선발이나 공중 폭격 같은 결정적 순간들에서뿐만 아니라, 고된 일상 속에서도 믿음이 있는 사람들이 더 잘 살았다.

 

생사가 엇갈리는 찰나적 삶에서도 고통이 그득한 매일의 삶에서도 신앙인은 더 잘 살아냈다고 적고 있습니다. 자신은 결곡한 불가지론적 지식인으로서 죽음을 느끼는 순간에도 신앙의 ‘유혹’을 거절한 사람이지만 신앙인의 이러한 특별함, 좀 더 정확히는 탁월함을 인정하는 데 인색하지 않았습니다. 프리모 레비는 그 근거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우주는 우리의 우주보다 더 방대하고, 시간과 공간 속에 더 확장되어 있었으며, 무엇보다도 이해할 수 있는 것이었다.

 

신앙인은 자신의 존재와 삶을 광활함the Spaciouness의 세계를 향해 열어놓고 있기 때문에 자신의 고통을 해석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고통의 의미를 알 수 없을 때 인간 존재와 삶은 걷잡을 수 없이 파괴되고 마는 것이기에 넓은 관점의 확보야말로 관건적 사항이라 할 것입니다.

 

광활함의 세계를 향해 열린 존재와 삶이란 과연 무엇일까요? 단순히 유한한 인간보다 큰 존재인 신을 믿고 구원과 행복을 의탁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 정도라면 우울증에 걸리고도 아니라고 잡아떼는 수준일 터인데 어찌 그 수준으로 아우슈비츠 안에서 탁월함으로 빛날 수 있겠습니까. 개인의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 신을 섬기면서 이를 광활함의 세계로 열린 존재와 삶이라 주장하는 것은 그 자체로 신성모독입니다. 인간의 사적 영역으로 신을 유폐시키고 있기 때문입니다. 신앙인이 광활함의 세계를 향해 열린 존재로서 산다면 그는 분명히 공적 영역, 단도직입으로 말하면 사회정치적 영역에서 신의 뜻을 펼치면서 살 것입니다. 기독교 어법으로 말한다면 하느님나라 구현에 헌신하고 있을 것입니다. 하느님나라는 “정의가 강물같이 흐르는” 상태입니다. 정의가 땅에 떨어진 현실은 오히려 두호하면서 교회 건물이나 호화롭게 짓고, 세습이나 하고, 막무가내 선교나 하고, 타종교 모독이나 하면서 이를 어찌 광활함의 세계를 향해 열린 존재와 삶이라 할 수 있단 말입니까. 어찌 “불가지론자가 아닌 사람들, 어떤 믿음이든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 권력의 유혹에 더 잘 저항했다.”라고 말할 수 있단 말입니까.

 

지금 우리사회는 정치뿐만 아니라 사회 모든 영역이 퇴행일로를 치닫고 있습니다. 어둠이 깊어지고 있습니다. 아니, 밝은 쪽도 있어요, 라고 말하는 바로 그 사람이 자기 밝음에 눈멀어 어둠 속에서 죽어가는 이웃을 내팽개치는, 그러니까 신을 자기 안으로 유폐시키는 사이비 신앙인입니다. 퇴행과 어둠의 시대에 우리는 다시 한 번 불가지론 지식인 프리모 레비의 질문 아닌 질문을 떠올립니다.

 

그들 중 일부는·······우리를 전도하려 노력했다. 그러나 어떻게 믿음이 없는 사람이 ‘시의적절한’ 믿음을 단지 시의적절하다는 이유로 그 자리에서 받아들이거나 만들어낼 수 있단 말인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