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라앉은 자와 구조된 자 - 아우슈비츠 생존 작가 프리모 레비가 인생 최후에 남긴 유서
프리모 레비 지음, 이소영 옮김 / 돌베개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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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자의 상식은 너무나도 가혹한 현실을 진실로서 받아들이는 데 저항했지만, 그 상식의 벽을 허무는 일이 철학자에게도 일어날 수 있었다. 결국 철학자는 괴물 같은 세상에서 살고 있기 때문에 괴물들이 존재한다는 것을, 그리고 데카르트의 논리 옆에 SS의 논리가 존재한다는 것을 인정할 수 있었다.

·······지식인은·······그 속성상 권력의 공범이 되는 경향이 있고, 따라서 권력을 승인하는 경향이 있·······다. 지식인은·······어떤 국가든 국가를 신격화하는 경향이 있다. 존재한다는 사실은 그것만으로도 존재를 정당화한·······다.(174-175쪽)

 

마음병 치유의 요체는 현실 인정입니다. 일어난 것을 일어난 것 그대로 느끼고 알아차리고 받아들이는 일입니다. 인정은 옳다고 여기는 사적 긍정이 아닙니다. 정당하다고 판단하는 공적 승인은 더군다나 아닙니다. 옳든 그르든 정당하든 부당하든 내 삶에 이미 들어와 있는 것을 있는 그대로 감성으로 이성으로 의지로 “그렇다” 하는 것입니다.

 

현실reality 인정은 문제를 정확히 들여다보는 것입니다. 문제를 정확히 들여다보지 않은 풀이로는 치유의 실재the Real를 일구어낼 수 없습니다. 치유의 실재는 사물(구조)이나 사건(운동)이 지니는 전체성에 터하여 구현되기 때문에 긍정하기 싫은, 승인하기 싫은 어두움을 ‘두 눈 똑바로 뜨고’ 꿰뚫어보아야만 하는 것입니다.

 

인정을 거부하거나 허투루 하였을 때 사이비 치유가 준동합니다. 목하 치유 마케팅을 주름잡고 있는 「시크릿」류의 긍정주의 ‘힐링’이 대표적인 예입니다. 인기 연예인, 그에 버금가는 종교인들이 대중매체에 나와 호들갑스럽게 뿌려대는 ‘힐링’ 이야기들은 대부분 부풀린 신변잡담 아니면 금방 들통 나고 말 거짓말 수준의 것들입니다.

 

이런 현상은 비단 마음병 치유 문제에서만 일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나치 치하의 수많은 지식인이 현실을 제대로 ‘인정’하지 못했기 때문에 불의한 권력을 ‘승인’한 것이 대표적인 예입니다. 멀리 갈 것도 없습니다. 우리나라 근현대사에서 지식인의 이런 곡학아세曲學阿世 사례는 이루 다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습니다.

 

지식인은 그 속성상 권력의 공범이 되는 경향이 있고, 따라서 권력을 승인하는 경향이 있다. 지식인은 어떤 국가든 국가를 신격화하는 경향이 있다. 존재한다는 사실은 그것만으로도 존재를 정당화한다.

 

오늘 아침 유명한 승려 한 사람이 ‘자기 삶의 내용이 풍요롭지 못하면 정치 이야기나 하고 남 일에 거품 문다’는 내용의 트윗을 올려 물의를 일으켰습니다. 풍요로워지는 방법 제시도 가관이거니와 ‘정치’와 ‘남 일’에 대한 천박한 인식은 ‘기도 안 찰’ 정도입니다. 대학교수이기조차 한 이런 백치 부역자가 오히려 사람들을 더욱 현혹시킵니다.

 

승려 교수에게 정치가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에 대해 길게 말하고 싶은 생각은 없습니다. 중생제도를 생애의 의무이자 보람으로 삼은 승려가 잘못된 정치로 말미암아 중생이 죽어나가고 있는 상황에서 정치 이야기를 연예인 이야기와 동급으로 치부하는 것은 단순한 무지가 아닙니다. 능동적 ‘승인’입니다. 우리사회는 그를 국민멘토라고 부릅니다. 오호애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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