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라앉은 자와 구조된 자 - 아우슈비츠 생존 작가 프리모 레비가 인생 최후에 남긴 유서
프리모 레비 지음, 이소영 옮김 / 돌베개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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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과 예술과 시는 그것들이 추방단한 곳을 해석하는 데에는 도움이 되지 않았다. 공포로 누벼지고 권태로 이루어진 ‘그곳’의 일상생활에서는 집과 가족을 잊는 법을 배우는 것이 건강에 좋으며, 마찬가지로 이성과 예술과 시를 잊어버리는 것이 건강에 좋다.·······

  이러한 일에는 교양 없는 사람들이 교양 있는 사람들보다 더 소질이 있었다. 그들은 “이해하려 하지 마라”라는 라거에서 배워야 할 첫 번째 현명한 격언에 먼저 적응했다. 거기 그 현장에서 이해하려 하는 행위는·······쓸데없는 노력이었다.·······논리와 도덕은 비논리적이고 부도덕한 현실을 받아들이는 것에 저항했다. 일반적으로 교양 있는 인간을 급속도로 절망으로 이끈 현실 거부는 바로 여기서 비롯했다. 그러나 각양각색의 짐승-인간들은 수없이 많았다. 세련된 문화를 가진 사람들이, 특히 젊은 사람들이면 더더욱 그 문화를 던져버리고, 단순화되고 야만적으로 되고, 그래서 살아남는 것을 나는 보았고 또 묘사했다.

  스스로 질문을 던지지 않는 것에 익숙한 단순한 인간은 이유를 묻는 쓸데없는 고문으로부터 안전한 곳에 있었다.(172-173쪽)

 

인간은 태초에 인간으로서 존재being한 것이 아닙니다. 인간은 오직 질문으로서 생성becoming됩니다. 그렇습니다. 인간이려면 오직 질문하는 인간homo interrogatorius뿐입니다. 그럼에도. 인간은 두 종류로 나뉩니다. 질문하는 인간과 질문하지 않는 인간. 질문하는 인간만이 참 인간입니다. 이 참 인간이 지식인입니다. 질문하지 않는 인간은 사이비 인간입니다. 사이비 인간은 다시 두 종류로 나뉩니다. 악마-인간과 짐승-인간.

 

프리모 레비가 묘사한 바에 따르면 짐승-인간은 “그 문화를 던져버리고, 단순화되고 야만적으로 되고, 그래서 살아남는” 인간입니다. 여기서 문화란 “이성과 예술과 시”이며 “논리와 도덕”입니다. 바로 질문의 근거이자 소산입니다. 하여 짐승-인간은 재차 이렇게 정의됩니다.

 

스스로 질문을 던지지 않는 것에 익숙한 단순한 인간

 

구약 성서에 나오는 에서가 팥죽 한 그릇을 위해 장자의 권리를 넘기듯 이들은 “건강”하고 “안전”하게 “살아남는 것”을 대가로 질문을 팔아버린 것입니다. 이들이 의문문 대신 신봉하게 된 것은 다음의 금지명령문입니다.

 

“이해하려 하지 마라.”

 

이들에게 이런 명령을 내린 자들이 바로 악마-인간입니다. 악마-인간에게는 폭력 프로그램만이 입력되어 있을 뿐이므로 질문이 필요하지도 가능하지도 않습니다. 오직 폭력을 통해 절대소수의 악마와 절대다수의 짐승으로 양극화되는 세상을 만드는 것이 지상과제일 뿐입니다.

 

오늘 우리사회가 이 아우슈비츠를 재현하고 있습니다. 언제나 자신의 말만을 투명한 진리라고 선포하는 무리가 “파부침주破釜沈舟의 자세로 임하지 않으면 적에게 질 것”이라며 더욱 강고하게 모든 질문을 봉쇄할 것임을 재천명하고 나섰습니다. 생명 살릴 골든타임은 말아먹고 경제 살릴 골든타임을 말하는 악마의 입으로 99%에게 “건강”하고 “안전”하게 “살아남는 것”을 강요하고 있습니다. 이에 순응한 자들은 즐겁게 “행복”과 “힐링”을 지절거리며 짐승의 길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수용소 안의 행복과 힐링이 마약임을 모르는 한 인간일 수는 없습니다. 이것을 깨닫고 옆 사람과 공유하는 자만이 인간입니다. 악마-인간과 짐승-인간 사이, 지식-인간, 그 이름이 바로 지식인입니다. 지금-여기서 인간은 오직 지식인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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