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라앉은 자와 구조된 자 - 아우슈비츠 생존 작가 프리모 레비가 인생 최후에 남긴 유서
프리모 레비 지음, 이소영 옮김 / 돌베개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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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우슈비츠에서 문화가 갖는·······유리한 점들은 정말 없었던가?·······

  내게도 문화는 유용했다. 언제나 그랬던 것은 아니고, 가끔은 아마도 예기치 못한 숨은 방식으로였지만 내게는 도움이 되었고 어쩌면 나를 살렸는지도 모른다.·······

  나는 실용적인 개념들의 축적과 함께, 화학과 인접학문들로부터 유래하지만 더욱 폭넓게 응용할 수 있는 정신적 습관들의 막연한 자산을 학업으로부터 얻었다. 그리고 그것을 라거에 가지고 들어갔다.·······

  ·······나는 무엇보다도 내 직업으로부터 한 가지 습관을 얻었다. 곧 우연히 내 앞에 놓인 대상에 절대로 무관심하게 있지 않는다는 것이다.·······대상은 인간이지만 ‘표본’이기도 하다. 확인하고 분석하고 무게를 측정해야 할·······내 호기심을 충족시켜줄 양식이었다. 몇몇 사람들은·······나의 호기심을 거리를 두는 자세라고 평했다. 그렇지만 그 양식은 나의 일부분을 살아있게끔 유지하는데 확실히 도움을 주었고, 또 나중에는 내가 사고하고 책들을 집필할 수 있도록 소재를 제공해주었다.·······‘자연주의적’인 이러한 태도·······는 화학에서 비롯된 것이었다.·······내게 라거는 일종의 대학이었으며 우리에게 주변을 돌아보고 인간을 가늠하는 방법을 가르쳐주었다. 이렇게 말하는 것이 부디 냉소적으로 보이지 않기를 바란다.(166-171쪽)

 

마음 치료를 할 때 필요에 따라 종종 나누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주로 특정 인물에게 받은 상처가 끈질긴 원망과 분노로 남아 있는데 그 상대방은 인식 없이 요지부동일 때입니다.

 

“무심코 운전하고 길을 가던 중 뒤에서 쾅 하고 부딪치는 소리가 납니다. 돌아보니 어떤 다른 차입니다. 그럼 대뜸 그 운전자에게 화를 냅니다. 그렇지요?”

“예!”

“뒤를 돌아보니 커다란 돌입니다. 그럼 그 돌에게 화를 내나요?”

“.......”

 

돌한테 감정이 끼어들 여지란 없습니다. 상처를 줄 것도 받을 것도 없습니다.

 

아우슈비츠의 SS든 카포든 동료 포로든 감정을 교류할 만한 상태의 ‘사람’이 아님을 신속하고 정확하게 알아차린 프리모 레비의 감각 이성은 화학이란 학문이 가져다준 자연주의적 훈습을 통해 마련된 것입니다. 사람이지만 표본일 때, 그것은 “확인하고 분석하고 무게를 측정해야 할” 호기심의 대상일 뿐이므로 감정과 상처를 주고받을 이유가 없습니다. 감정과 상처를 주고받느냐 하는 문제는 아우슈비츠 상황에서라면 가히 결정적, 아니 치명적인 것입니다. 프리모 레비의 “어쩌면 나를 살렸는지도 모른다.”는 표현을 두고 그 누구도 함부로 말해서는 안 됩니다. 설혹 전혀 다른 삶의 방식이 있다손 치더라도 한 사람의 삶에서 운명적으로 생겨나 시시각각 그의 생사와 결합해 들어가는 “습관”의 무게는 어떤 진리와 깨달음보다도 육중합니다.

 

스스로를 아우슈비츠에서 살려낸 이 자연주의 지식인의 삶이 오늘 대한민국에서 우리를 살려내고 싶은 지식인이고자 하는 사람에게 매우 중대한 전언傳言이 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우연히 내 앞에 놓인 대상에 절대로 무관심하게 있지 않는다는 것이다.·······대상은 인간이지만 ‘표본’이기도 하다. 확인하고 분석하고 무게를 측정해야 할·······내 호기심을 충족시켜줄 양식이었다.

 

우리 앞에 놓인 대상, 그러니까 국가조직을 이용해 사적이익을 추구하는 매판독재반통일 세력에 절대로 무관심하게 있지 않는 기본자세. 인간이지만 ‘표본’이기도 한 저들을 확인하고 분석하고 무게를 측정하는 자연주의 호기심. 이 과정에서 발휘되는 도저한 주의 깊음, 냉정함, 결곡함, 곡진함. 바로 이것이 생사를 가릅니다.

 

지금 필요한 것은 저들을 향해 분노와 원망을 짓는 일이 아닙니다. 감정 투입은 저들을 ‘표본’ 이상의 존재로 전제했을 때 하는 행동입니다. 인간으로서 지닌 생명감각과 윤리의식에 기대어 하는 행위입니다. 이미 저들은 시스템 뒤에 숨었습니다. 더 강한 자들은 시스템 위에서 초월적 권위를 누리고 있습니다. 감정도 상처도 닿지 않는 세계를 향해 소리치고 울부짖은 결과가 스스로의 소진, 개죽음의 공포 이 둘뿐이라는 사실을 누구도 모르지 않습니다.

 

자연주의 지식인, 끽긴한 필요로 우리 앞에 서 있는 존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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