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라앉은 자와 구조된 자 - 아우슈비츠 생존 작가 프리모 레비가 인생 최후에 남긴 유서
프리모 레비 지음, 이소영 옮김 / 돌베개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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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과 별도로 교양 있는 사람에게는 막사 생활 역시 매우 고통스러운 것이었다. 그것은 홉스적 삶으로, 만인의 만인에 대한 끊임없는 전쟁이었다.·······당국으로부터 가해진 폭력은 받아들일 수 있었다. 그것은 글자 그대로 불가항력이었다. 그런데 동료들로부터 받은 구타는 예기치 않게 일어나는 불규칙적인 일이었다. 이 때문에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었고, 문명화된 인간은 여기에 좀처럼 대응할 줄 몰랐다.(162쪽)

·······아메리는 또 다른 에세이에서 핵심적인 일화 하나를 들려준다.·······몸집이 거대한 폴란드인 일반 범죄자 하나가 아무것도 아닌 일로 그의 얼굴에 주먹을 날렸다. 그는 동물적 반응에서가 아니라 라거의 뒤틀린 세계에 대한 이성적 저항에서 혼신의 힘을 다해 주먹을 되돌려주었다. “나의 존엄은 전부, 그의 턱을 향한 그 주먹에 있었다. 결국에는 상대의 무자비한 구타에 육체적으로 훨씬 약한 내가 굴복했지만, 그 사실은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 흠씬 두들겨 맞아 아팠지만, 나는 나 자신이 만족스러웠다.” ·······그의 이러한 선택이 그로 하여금 삶의 기쁨을 발견할 능력이 없게 만들 정도로, 아니 살아갈 능력이 없게 만들 정도로 엄격하고 비타협적인 태도로 그를 이끌었다는 점을 지적해야겠다. 온 세상과 “주먹다짐을 하는” 사람은 자신의 존엄성을 되찾을 순 있지만 너무나 비싼 대가를 치르게 된다. 곧 패배가 확실하기 때문이다. 1978년 잘츠부르크에서 있었던 아메리의 자살은 모든 자살이 그렇듯이 분분한 해석을 낳았다. 그러나 지나고 나서 보면 폴란드인에 맞선 이 일화가 그의 자살에 대한 하나의 해석을 제시해준다.(163-165쪽)

 

폭력에 대해 어떤 자세를 취할 것이냐 하는 문제는 아마도 인간에게 영원한 아포리아일 것입니다. ‘인간이기 위하여’ 화두로 잡는 문제 가운데 폭력 문제만큼 쉽지 않은 것도 없습니다. 일반적으로 폭력을 제압하거나 응징하는 일이 불가피하게 또 하나의 폭력일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비폭력이 폭력에 맞서는 방법일 수 있느냐 하는 문제도 결국은 마찬가지입니다. 가령 비폭력으로 대응하다가 맞아서 목숨을 잃었을 경우, 이를 인간이 자기 존엄을 지키는 행위라 할 수 있느냐 하는 질문에 완벽한 답을 줄 수 없기 때문입니다.

 

폭력의 문제는, 있어서는 안 된다는 근본적 요청의 진리 빼고, 그 다음은 모두 진리의 문제가 아닙니다. 진실의 문제입니다. 진실은 사람마다 다른 진심을 담고 있습니다. 진심은 객관적 기준이나 방향이 선험적으로 정해져 있지 않습니다. 어떤 이의 진심은 또 다른 어떤 이의 진심이 아닐 수 있습니다. 이 어긋남은 인간에게 숙명적인 것입니다. 아메리의 패배를 무릅쓴 혼신의 되돌려주기는 레비의 “절대적인 열등함” “타고난 무능력”(164쪽)과 다른 진심에서 우러나온 것입니다. 하여 레비의 아메리 비평은 또 다른 비평을 기다려야 합니다.

 

레비는 아메리의 선택이 “그로 하여금 삶의 기쁨을 발견할 능력이 없게 만들 정도로, 아니 살아갈 능력이 없게 만들 정도로 엄격하고 비타협적인 태도로 그를 이끌었다”고 지적했습니다. 그의 이런 비평은 곧바로 아메리의 자살과 연결됩니다.

 

폴란드인에 맞선 이 일화가 그의 자살에 대한 하나의 해석을 제시해준다.

 

결국 그는 아메리의 지나치게 엄격하고 비타협적인 선택이 살아갈 능력을 잃게 만들었다, 즉 자살하게 만들었다고 고찰한 것입니다. 그가 매순간 최선을 다해 살았듯 이 고찰에서도 최선을 다했을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문제는, 그 최선의 연장선에서 아메리의 죽음과 똑같은 죽음이 그 자신에게 들이닥쳤다는 사실입니다. 레비는 지나치게 엄격하고 비타협적인 선택을 하지 않았으므로 의당 스스로 살아갈 능력을 잃게 만들지 않았을 터입니다. 어떻게 동일한 결과가 나타난 것일까요. 만일 자살의 의미가 다르다면 레비는 살아갈 능력이 충분히 있는 상태에서 죽음을 선택했다는 말인데 이게 과연 가능할까요.

 

이런 의문을 풀기 위해서는 두 사람의 삶을 대비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아메리는 대학에서 문학과 철학을 공부한 인문학도입니다. 당연하게도 그의 안목은 스스로 밝혔듯 “인문주의적”(158쪽)일 것입니다. 레비는 아시다시피 화학을 공부한 자연과학도입니다. 당연하게도 그의 안목은 스스로 밝혔듯 “자연주의적”(170쪽)일 것입니다. 두 사람의 이 차이는 매우 중요합니다.

 

수용소에서의 우리의 기억은 중요한 세부 사항들에서는 대부분 일치하지만, 흥미로운 한 가지 사항에서는 달랐다. 아우슈비츠에 대해 지워지지 않는 총체적 기억을 간직하고 있다고 늘 주장해온 내가 그의 존재를 잊었다는 사실이다. 비록·······유명했던 카를로 레비와 나를 혼동하긴 했지만, 그는 나를 기억한다고 단언했다. 아니 우리가 몇 주 동안 같은 막사에서 지냈다고 했다.(157쪽)

 

레비가 수용소에서 보기 드문 이탈리아인이면서도 화학자였기 때문에 그렇지 않은 아메리보다 더 인상적이었을 것이라는 점을 인정하더라도 몇 주 동안 같은 막사에서 지낸 동료를 기억하느냐 여부는 아무래도 두 사람의 근본적인 안목 차이 때문이 아닐까 합니다. 자연주의적 안목은 기본적으로 실험적 관찰에 근거를 둡니다. 실험적 관찰은 ‘표본’(171쪽)이 그 대상입니다. 표본에 대한 ‘호기심’(171쪽)은 인과적 알고리즘을 따라갑니다. 인과적 알고리즘을 벗어난 것은 실험자의 시야에서 사라집니다. 인문주의적 안목은 기본적으로 통찰에 근거를 둡니다. 통찰은 대상을 사물화하지 않습니다. 사물화하지 않은 대상은 인과적 알고리즘을 벗어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벗어난 것도 통찰자의 시야에서는 사라지지 않습니다.

 

패배가 확실”한 싸움을 하지 않는 것은 자연주의적 안목을 가진 사람이 기본적으로 지니고 있는 삶의 자세입니다. “패배가 확실”한 싸움이라 할지라도 “뒤틀린 세계에 대한 이성적 저항”을 “혼신의 힘을 다해” 하는 것은 인문주의적 안목을 가진 사람이 기본적으로 지니고 있는 삶의 자세입니다. 둘은 이렇게 서로 다릅니다. 달라서 둘 다 필수불가결합니다.

 

저는 아메리의 지나치게 엄격하고 비타협적인 선택이 살아갈 능력을 잃게 만들었다, 즉 자살하게 만들었다고 한 레비의 고찰에 일부 동의하고 일부 동의하지 않습니다. 아메리의 선택이 자살과 연결된다는 고찰에는 동의하지만 그 선택이 지나치게 엄격하고 비타협적이어서 살아갈 능력을 잃게 만들었다는 고찰에는 동의할 수 없습니다. 만일 레비의 이 고찰이 옳다면 유연하고 타협적인 선택을 하여 살아갈 능력을 유지한 그 자신은 어찌하여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말입니까.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결과를 놓고 볼 때 아메리가 극단이라면 레비도 극단입니다. 아닙니다. 둘 다 극단이 아닙니다. 서로 자기답게 자기 길을 간 것입니다. 구태여 표현한다면 아메리는 ‘종합’의 결과 죽음을 택한 것이고 레비는 ‘분석’의 결과 죽음을 택한 것입니다.

 

폭력 앞에서 아메리가 되든 레비가 되든 각자 자기 진실에 따라 결단할 것입니다. 오늘 대한민국을 살아가는 우리 앞에도 수용소적 폭력이 횡행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이 폭력 앞에서 내가 지식인인가, 묻는 일은 무의미합니다. 지식인이어서 이 폭력 앞에 뭔가 결단을 내려야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 진실에 걸맞은 결단을 내리는 자가 바로 지식인입니다. 그 지식인에게 죽음은 이미 삶 한가운데 들어와 있습니다. 이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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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12-30 17:1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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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12-30 17:4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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